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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문공은 예악의 기초를 만든 인물로 알려져 있다. 팔괘의 효(爻)를 해설하여 [[역경]]을 완성했으며 주의 의식과 의례를 정리해 《[[주례]](周禮)》와 《의례(儀禮)》을 저술했으며, 문공의 시대에서 약 500년이 지난 [[춘추 시대]]의 인물로 [[유학]]을 정립한 [[공자]](孔子)는 노의 수도였던 곡부 출신으로서 문공을 이상적인 성인으로서 꿈에서도 그를 보고 싶어할 정도로 경모하여, "오랫동안 꿈에서 주공을 뵙지 못했다(吾不復夢見周公)"고 말하며 "나도 이제 늙어버렸다"고 탄식했다([[논어]] 술이편)고 한다. 현대의 학자들은 주역이 [[기원전 403년]] 이후 사이에 체제가 갖추어진 것으로 보고 주례를 익명의 다른 사람이 쓴 것으로 보고 있다.
 
주공(周公)이라는 칭호는 문공 자신이 주의 옛 땅이었던 기산(岐山)에 봉해진 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으며, 무왕이 사망한 뒤 문공은 실제로 즉위하여 왕이 되었다가 뒤에 조카 성왕에게 왕위를 돌려주었다는 설도 있다. '''주(周)'''나라 관작은 공후백자남이고, '''공(公)'''은 최고 관작이다. 기산은 상나라 서쪽에 있기 때문에 서기(西岐)로 불렸고, 족읍(族邑) 수장을 백(白)엄지를 써 백(伯)으로 표시한다. 서백(西伯)상나라 왕에게 풀려난 후 자기 땅 일부를 상나라 왕에게 바쳤고, 감동한 상나라왕은 군권을 상징하는 부월을 하사하면서 후(侯) 관작을 내렸기에, 서백후(西伯侯)로도 불린다. 주공(周公)은 주나라 공이란 관작을 줄여 부르는 말이고, 주(周)나라 왕실 성(姓)은 희(姬)인데, 주나라가 망하고 왕실 성은 망한 주나라 주(周)로 불리는 것이 성씨 변화 일반적인 현상이다. 주왕(周王)이나 주공(主公)이 아닌 주공(周公)으로 불린 것은 조카를 무시하고 사익을 취하지 않았다는 뜻과 왕으로 즉위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주공의 묘에 대해서는 그 위치가 불확실하였으나 2004년에 중국 [[산시 성]](陝西省) [[바오지 시]](宝鶏市)의 주공묘(周公廟) 부근에서 발견된 무덤을 주공의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