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디아 코마네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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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몬트리올 올림픽(1976) ===
열네 살에 코마네치는 [[1976년]] [[1976년 하계 올림픽|몬트리올 하계 올림픽]]에 출전했다. 거기서 그는 이단 평행봉 연기로 사상 최초의 10점 만점을 받아 전 세계인들을 놀라게 했다.<ref>당시에는 1단위만 표시되었던 점수판에는 1.00점이라고 표시되기도 했다.</ref>하지만 그의 명연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53cm, 39kg의 가냘픈 몸매의 코마네치는 그 후 그 대회에서 10점 만점을 여섯 차례나 더 기록하며 결국 금메달 셋(개인종합, 평균대, 이단 평행봉), 은메달 하나(단체종합), 동메달 하나(마루운동)을 획득했다.코마네치는 이미 1975년 유럽선수권에서 체조사상 처음으로 10점 만점을 받아 세계무대에서의 만점을 예고했다. 올림픽 역사가들은 몬트리올 올림픽 여자 체조에서 루마니아의 코마네치가 무려 일곱번이나 만점을 기록하면서 금메달 3개를 차지한 것을 매우 중요하게 기록하고 있다. 사실 체조는 기록경기가 아니라 인간의 눈으로 선수들의 플레이(또는 연기)를 보고 10점을 만점으로 해서 점수를 매기는 경기이기 때문에 9.9점이라면 몰라도 10점 만점을 주기가 어려운 종목이다. 신이 아니고서는 완벽한 플레이를 할 수 없다는 게 그때까지 체조계의 불문율이었던 것이다. 코마네치의 연기는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즉 심판들이 앞으로 ‘이보다 더 뛰어난 플레이는 없다’는 뜻에서 만점을 준 것이다. 여자체조는 코마네치를 기점으로 여성미를 보여주는 눈요깃거리 스포츠에서 기술이 가미된 ‘예술’로 승화했다. 1976년의 몬트리올 올림픽 대회 이후 그녀는 당시 공산국가였던 루마니아의 국민적 영웅이 되어 '영웅'<nowiki><ref>[[공산주의 국가]]들에서는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 늦추어진 산업화를 격려하기 위해 생산성이 높은 노동자들을 생산 영웅, 노력 영웅이라고 칭찬하여, [[노동자]]들을 격려했다. 코마네치도 여자체조에서 뛰어난 성적을 보인 운동선수이므로 정부에서 영웅이라고 부르면서 칭찬한 것으로 생각됨.</ref></nowiki>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코마네치는 뛰어난 체조 실력만큼이나 별명도 많았다. 체조경기장에서는 웃음 짓는 일이 거의 없어서 ‘작은 바위 덩어리’로 불렸고, 가로 10cm의 평균대를 훨훨 날고 이단평행봉에서 공중을 헤집듯이 절묘한 묘기를 연출할 때는 ‘냉정한 작은 벼룩’이라고도 불렸다. 당시 시사 잡지 《[[타임 (잡지)|타임]]》은 그를 “인간의 몸을 빌려 지상에 나타난 요정”이라고 극찬했다.
 
=== 1976년 이후 ===
[[1976년]] 이후 코마네치는 당시 [[공산주의]] 국가였던 [[루마니아]]에서 젊은이로 성장하면서 [[자유]]가 없는 사회에 대한 어려움과 분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나이가 들고, 아는 것도 많아졌고, 마침내 삶도, 경기도 결코 공정하지 않으며, 복종은 선택이지 주어진 숙명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코마네치의 십대가 되고픈 욕망과 훌륭한 운동선수가 되고픈 욕망은 서로 충돌하게 되었다.
[[1977년]] 그녀는 주로 앞으로 뭘 하고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만 골몰했다. [[체조]]선수로서의 생명이 끝나간다고 느꼈고, 여느 십대처럼 혼란스러웠고 불안했으며, 자신의 삶의 다음 단계를 준비해야 한다는 절박감을 느꼈다. 당시 루마니아 체조연맹은 벨라 카롤리 코치와 코마네치를 당분간 떼어놓은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그녀는 훈련을 하면서 [[대학대학교]] 수업을 받기 위해 수도인 부쿠레슈티로 떠났다. 이후의 여섯달을 코마네치는 훗날 자신의 삶에서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회고한다. [[사춘기]]인데다 과식까지 해서 살이 10kg나 찌고, 부모님의 결혼 생활도 삐걱거리더니 결국 두 분이 이혼하기로 한 것이다.
[[1978년]] 카롤리는 정부로부터 전국청소년체조대회 팀을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에 데리고 나가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런데 정부는 거기에 덧붙여 새로운 선수들과 함께 과거 팀원들도 반드시 포함시킬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카롤리는 코마네치를 다시 복귀시키기로 마음먹고, 그 해 그녀는 그와 함께 데바로 돌아갔다. 하지만 1978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4위에 그치는 부진함을 보였고, 언론은 그녀가 끝장났으며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고 평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에 기죽지 않고 훈련을 계속해 불과 다섯달 뒤에, 시련을 극복하고 유럽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금메달]]을 땄다.
[[1979년]]에는 손의 감염으로 대부분의 시합에 출전하지 못했지만 [[1980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22회 올림픽경기대회에서는 평균대와 마루운동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개인종합 준우승을 하였다. 이로써 코마네치는 올림픽에서 5개의 금메달, 3개의 은메달, 1개의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코마네치의 연기는 힘차면서도 부드럽고, 과감하면서도 우아하여 인간 육체 표현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