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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무주는 세력이 더 강성해져 정양을 함락시킨뒤 안문으로 돌아오자 돌궐에서는 그를 정양가한(定楊可汗)에 책봉하였고 유무주는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한(漢), 연호를 천흥(天興)이라 하였다.
 
[[송금강]](宋金剛)이 [[두건덕]](竇建德)을 공격하였다가 역주(易州)에서 패하여 남은 무리를 이끌고 의탁해오자 유무주는 그를 송왕(宋王)으로 봉했다.[[619년]]([[무덕]] 2년) 3월 유무주는 남하하여 병주 황사령(黃蛇嶺)에 주둔하였는데 병주총관 [[이원길 (603년)|이원길]](李元吉)과 [[거기장군]](車騎將軍) 장달(張達)이 이에 맞서니 유무주의 군사는 전멸하여 패했다.
 
같은해 5월에 다시 [[핑야오현|평요]](平遙)를 함락하고 6월에는 송금강에게 3만의 군사로 [[태원군|태원]](太原)과 [[서하군|개주]](介州)를 공격하게 하자 이에 [[당 고조]]는 [[우복야]](右僕射) [[배적]](裴寂)을 진주도 행군총관(晉州道 行軍總管)으로 임명하여 [[강보의]](姜寶誼)와 양쪽에서 공격하게 하였으나 크게 패하여 강보의는 전사하고 배적은 진주로 달아났다.
10월에는 하현(夏縣)사람 [[여숭무]](吕崇茂),[[융지시|포판]](蒲坂)의 [[왕행본]](王行本) 등이 유무주에게 호응하여 호주(浩州) 등 [[산시성 (산서성)|산서]](山西) 지역 대부분이 유무주의 세력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관중 지방이 위태롭게 되었다.
 
이에 당 고조는 " 도적의 형세가 이와 같으니 [[황하]](黃河)의 동쪽을 버린다면 싸워서 [[관서]](關西)를 지키긴 어려울것이다. " 하며 진왕(秦王) [[당 태종|이세민]](李世民)에게 출정하게 하였다.
 
11월 이세민이 군사를 거느리고 용문관(龍門關)과 백벽에 당도하여 진을 치고 유무주를 살펴보고 말하길 "재물을 축적할생각으로 약탈을 하고있진 않다" 하였다.[[620년]](무덕 3년) 송금강의 군사들이 양식이 떨어져 물러나려하자 이세민은 군사를 이끌고 여주(呂州),[[고벽령]](高壁嶺),[[작서곡]](雀鼠谷)에 이르기까지 추격하며 하루에 여덟번 싸워 모두 이겼다.
== 참견 ==
[[백벽전투]](柏壁之戰)
 
[[분류:생년 미상]]
[[분류:수나라 말기 군벌]]
[[분류:622년 죽음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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