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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3년]](성종 2년) 좌승(左丞)으로써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임명되었다.<ref>《고려사》 권3, 〈세가〉3, 성종 2년(983년) 9월 6일(무오)</ref>
 
[[993년]](성종 12년)<ref>이때는 지신주(知信州)를 지내고 있거나(이제현, 《익재난고》 권9의 하, [사찬(史贊)], 성왕(成王)) 민관어사(民官御事)에서 물러난 상태(《고려사》 권94, 〈열전〉7 , 서희)였다.</ref> [[거란]]의 [[소손녕]](蕭遜寧) 등이 이끄는 대규모 병력(기록에는 80만 명으로 일컬었다)이 고려를 침공하였을 때, [[서경]] 이북의 땅을 할양하라는 거란의 요구에 대부분의 신료들이 찬성하는 가운데 [[서희]](徐熙)가 나서서 거란이 대규모 병력을 거느리고 와서 영토를 할양하라고 요구한다고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땅을 내어주는 것은 맞지 않다고 반대하였고, 이지백도 나서서 [[나은 (당)|나은]]의 시<ref>나은, 《갑을집》 권3, 주필역(籌筆驛)</ref>를 인용해 [[촉한|촉]](蜀)의 [[유선 (촉한)|후주 유선]](後主 劉禪)에게 [[조위|위]](魏)에 항복할 것을 권했던 초주(譙周)의 고사를 들어 반대하면서 일단 금은과 보물을 소손녕에게 뇌물로 보내면서 거란이 고려로 침략한 까닭을 살피는 것이 우선이며, 아울러 성종이 폐지했던<ref>《고려사》 권3, 〈세가〉3, 성종 6년(987년) 10월</ref> [[연등회]](燃燈會)나 [[팔관회]](八關會), 선랑(仙郞) 등의 행사를 다시 거행하고 '다른 나라의 색다른 풍속'[他方異法]을 좇지 않음으로써 국가를 보전하고 태평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성종이 중국의 풍습을 즐겨 따르려는 것에 '나라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았던 것'을 반영한 것이었다.<ref name=a>《고려사》 권94, 〈열전〉7 , 서희</ref>
 
성종은 서희와 이지백의 건의대로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 할양한다는 계획을 중지하였으며, 이후 안융진에서 고려의 대도수와 낭장 유방 등이 거란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이어 서희와 소손녕의 외교 교섭으로 거란은 고려가 고구려 옛 땅을 수복하고 거란과 국경을 인접하게 되면 양국이 수교한다는 조건으로 병력을 철수시켰으며 고려는 [[압록강]] 인근의 [[여진족]]을 내쫓고 압록강 남쪽 서북면에 6개의 주를 설치, 고려령으로 삼았다.<ref nam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