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요시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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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가요시는 장성하여 지용을 겸비한 무장으로 자라났고, 가와치 슈고다이로 기나이에 강한 세력을 떨치고 있던 유사 나가노리(遊佐長教, 하타케야마 미슈 가畠山尾州家의 가신이다)의 딸을 측실로 맞이하고 덴분 8년([[1539년]]) 미요시 종가의 본거지를 아와 국에서 셋쓰 고시미즈 성으로 옮기기로 결단하였다.
 
셋쓰에서 힘을 키웠던 나가요시는 시코쿠(四国)의 유수(留守)를 맡고 있던 아와의 동생 미요시 사네야스짓큐(三好実休)나 아와지의 아타케 후유야스(安宅冬康), 사누키(讃岐)의 소고 가즈마사(十河一存) 등과 협력, 덴분 11년([[1542년]]) 기자와 나가마사 등 아버지의 원수 세력들을 차례대로 격파하고 호소카와 집안 내에서 아버지 이상의 세력을 쌓아올렸다. 다이헤이지 전투(太平寺の戦い)이다.
 
덴분 18년([[1549년]]) 나가요시는 유사 나가노리의 원군을 얻은 가운데 호소카와 다카쿠니의 양자 우지야스(氏綱)를 옹립해 호소카와 하루모토에게 반기를 들었고, 하루모토의 세력을 군사적인 측면에서 지지하고 있던 미요시 마사나가를 셋쓰의 에구치(江口)에서 쳐부수었다(에구치 전투). 쇼군 ・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義晴)와 호소카와 하루모토는 오쓰(大津)로 달아나고 정권이 붕괴된 결과, 나가요시는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로써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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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요시 요시쓰구(三好義継) - (가와치 이이모리 산성 → 가와치 다카야 성(高屋城) → 가와치 와카에 성(若江城))
* 친족의 거점
** 미요시 사네야스짓큐(三好実休) ‐ 아와 쇼즈이 성(勝瑞城) → 가와치 다카야 성
** 소고 가즈마사(十河一存) ‐ 사누키 도카와소고 성(十河城)의 성주
** 아타케 후유야스(安宅冬康) ‐ 아와지 스모토 성(洲本城) 성주
* 정권 붕괴 후
** 미요시 나가하루(三好長治) ‐ 아와 쇼즈이 성주
** 소고 가즈야스마사야스(十河存保) ‐ (아와 쇼즈이 성→도카와성→소고 성→히키타 성引田城)
* 인척 일족의 거점
** 유사 나가노리(遊佐長教) - 가와치 와카에 성(若江城) 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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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요시는 렌카(連歌)를 몹시 좋아하였고 선불교에 심취하여 겐지 이야기(源氏物語) 등의 고전을 가까이 하는 풍아한 무사이기도 하였다. 또한 기리시탄에 대해서도 관용한 대응을 보이는 등 불교(종파에 관계없이)와 신토(神道), 그리스도교 등 폭넓은 종교를 인정하였다. 때문에 불교 내부의 대립(법화종과 일향종)도 잠잠해졌다. 또한 유능한 동생들을 각재각소에 배치하여 거대해진 세력을 통치하였다. 오닌의 난 이후의 길었던 전란으로 황폐해진 교토를 부흥시키고, 사카이(堺)의 마을을 일대 교역항으로써 정비하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옛 세력의 대항은 멈추지 않았고, 가와치 ・ 기이(紀伊)의 슈고로 3대 간레이의 하나였던 하타케야마 씨의 하타케야마 다카마사、남부 오미의 반국 슈고(半国守護)로 호소카와 하루모토의 종형제였던 롯카쿠 요시카타 등은 반(反)미요시 군세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전투 와중에 구메타 전투(久米田の戦い, 지금의 [[기시와다 시]])에서 동생 사네야스를짓큐를 잃었고 적남 ・ 요시오키나 자신의 동생들(소고 가즈마사、아타케 후유야스)에 이어、자신도 에이로쿠 4년([[1564년]])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미요시 나가요시 사후의 미요시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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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요시테루에게는 출가한 동생 ・ 가쿠케이(覚慶)가 있었는데 요시테루의 옛 신하들에게 옹립되어 에이로쿠 9년([[1566년]]) 2월에 환속해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秋''')라 이름하고 에이로쿠 9년([[1566년]]) 4월 21일에 종5위하 ・ 사바노카미(左馬頭, 차기 쇼군이 취임하는 관직이기도 했다)로 서위 ・ 임관하였다. 이에 대해 미요시 산닌슈는 앞서의 사카이 구보(堺公方)였던 아와 구보 ・ 아시카가 요시쓰나의 아들인 아시카가 요시히데(足利義栄)를 제14대 쇼군 후보로 옹립하고 에이로쿠 10년([[1567년]]) 1월에 요시히데는 종5위하 ・ 사바노카미(左馬頭)로 서임되었다.
 
산닌슈는 마쓰나가 히사히데와의 전투에서 미요시 가문의 당주였던 미요시 요시쓰구를 끼고 에이로쿠 9년(1566년) 9월에는 아와 ・ 사누키의 군세를 거느린 사네야스의짓큐의 아들 미요시 나가하루(三好長治)、그 중신인 시노하라 나가후사(篠原長房)、미요시 쇼간(三好笑岩, 미요시 야스나가)、아와 호소카와 가의 호소카와 사네유키(細川真之)、쇼군 후보방(将軍候補方) ・ 아시카가 요시히데도 합류하여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였다. 그러나 에이로쿠 10년([[1567년]]) 4월에 당주 요시쓰구가 돌연 도망쳐서 히사히데에게 보호를 요구하였다. 이로 해서 히사히데측은 한숨 돌렸지만 여전히 열세에 있었다(도다이지 대불전이 전소된 사건으로 유명한 도다이지 대불전 전투도 이 무렵에 일어났다). 미요시 산닌슈측에 서있던 시노하라 나가후사(篠原長房)는 히사히데측의 셋쓰 고시미즈 성을 빼앗고 이곳을 거점으로 야마토 및 각지를 돌며 전쟁을 벌였다. 이 시기의 나가후사에 대해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저서 『프로이스 일본사』에서 「이 무렵, 그들(미요시 산닌슈) 이상의 세력을 가지고 그들을 관할하다시피 한 것은 시노하라도노(篠原殿)로 그는 아와 국에 있어서 절대적(권력을 가진) 집정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에이로쿠 11년([[1568년]]) 2월, 아시카가 요시히데(足利義栄)는 제14대 쇼군으로 취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