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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의 문인이다. 숙종 때인 1686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저작이 되고 홍문관박사, 검열을 거쳐 수찬, 부수찬, 부교리 등을 두루 했다. 하지만 기사환국으로 유배를 갔다가 1694년, 갑술환국 이후 복권되어 장령이 되고 곧 부교리로 승진한다. 이후 사간, 부수찬, 부교리를 거쳐 겸필선과 응교, 시강관 등을 두루 했다. 이후 다시 교리를 하다가 1696년에 충주목사로 외직에 나갔다. 이후 교리로 내직에 복귀해 보덕, 부교리를 하며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연이어 사인을 거쳐 1697년에 당상관에 올라서 [[승지]]가 된다. 1698년에 한산군수로 외직에 나갔다가 다시 [[대사성]]으로 내직으로 복귀한 뒤 [[승지]], [[이조참의]]를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민정을 다스렸다. 이후 [[대사성]]과 [[대사간]]을 하다가 1701년에 [[승지]]가 되는데 장희빈의 사사를 주청했다. 이후 [[대사간]]을 하다가 1704년에 [[우부승지]]로 승차한다. 이후 [[부제학]]과 [[대사간]]을 거쳐 [[이조참의]]로 다시 임명되었다가 숙종의 총애를 받아서 바로 [[대제학]]으로 승차하고 이후 [[대사헌]]도 겸한다. 이후 [[공조참판]]을 하다가 [[도승지]], [[대사헌]], [[한성부판윤]]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곧 [[예조판서]]가 된다. 이후 [[예문관]][[제학]]을 거쳐 바로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했으며 곧 [[이조판서]], [[형조판서]]를 거쳐 [[우참찬]]까지 임명된다. 그 뒤 지중추부사로 물러났다가 다시 [[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다. 계속해서 [[대제학]]과 [[대사헌]]을 거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공조판서]] 등 정경의 반열을 두루 거치다가 경신처분 이후 다시 [[대제학]]이 되었으며 이후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선)|이건명]], [[조태채]], [[이유]], [[이여]], [[서종태]] 등 노론 정승의 측근이 된다. 연이어 [[민진후]], [[민진원]], [[이만성]] 등과 노론의 핵심 인물이 된다. 그리고 [[이조판서]], [[예조판서]], [[대제학]]을 거쳐 [[판의금부사]]로 임명되고 곧 다시 [[대제학]]을 겸한다. 이후 다시 [[이조판서]], [[예조판서]]를 거쳐서 [[대제학]], [[판의금부사]]를 하다가 다시 [[예조판서]]를 한다. 그리고 곧 다시 [[대제학]]과 [[판의금부사]]를 거쳐 [[호조판서]]가 된다. 계속해 다시 [[대제학]]을 한 뒤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을 하며 노론의 실권을 장악했고 판돈녕부사로 물러났다가 1719년에 [[이조판서]],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호조판서]]를 하며 노론 계열의 핵심인물로 성장했다. 이후 [[예문관]][[제학]]과 [[호조판서]]를 하다가 경종 즉위 후 동지정사로 중국에 다녀오고 [[이조판서]]로 지경연사를 겸했다. 이후 [[예조판서]]로 좌빈객을 겸했고 곧 판돈녕부사로 물러나지만 [[병조판서]]가 되었다. 하지만 신임사화로 인해 실각되고 유배되었다가 1723년, 배소에서 사망한다. 영조 즉위 후 복권되었다.
 
== 평가 ==
학문이 뛰어나며 글씨를 잘 썼다. [[송시열]]의 문인으로 [[권상하]],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선)|이건명]], [[조태채]]와 많이 교유했다.
 
{{토막글|사람}}
 
[[분류:1657년 태어남출생]]
[[분류:은진 송씨]]
[[분류:1723년 죽음사망]]
[[분류:서인]]
[[분류:노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