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타리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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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타리나는 [[시골]]에서 교리를 잘 알지 못하는 [[천주교]] 신자 부모 밑에서 태어나서, 14세에 [[조씨#나라 조 (趙 / 赵)|조(趙)씨]] [[성씨|성]]을 가진 한 남성과 결혼했다. 이후 그녀는 남편이 개종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3남매를 낳아 기르며 가르쳤다.
그들 중 [[조 막달레나]]가 [[천주교]]에 가장 열심이었다. 그녀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기도]]하고는 어머니의 삯바느질을 도왔다. 조 막달레나가 18세가 되자, 어머니 이 가타리나는 그녀를 한 교우에게 시집보내려 했지만, 조 막달레나는 어머니에게 [[처녀]]로 살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 가타리나는 딸의 결심을 이해할 만큼 독실했지만, 이교도들이 딸을 의심할까봐 염려스러웠다. 왜냐하면,
조 막달레나는 가족의 성가신 요구와 사람들의 의심을 피해 [[한양]]으로 올라왔고, 한 [[천주교]] 집안의 [[하녀]]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과로]]와 [[영양실조]]로 병이 들었다. 그녀는 병이 완쾌되고, 좀 더 편한 곳으로 이사했다. 그녀는 조금이나마 돈을 벌어 그녀의 어머니한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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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8년]] 고을에서 사사로운 [[박해]]가 일어나자, 이 가타리나는 딸과 함께 박해를 피해 [[한양]]으로 올라왔다. [[앵베르]] [[주교]]는 그들의 소식을 듣고, 그들이 머물 수 있도록 [[이영덕 막달레나]]와 [[이인덕 마리아]] 자매 교우의 집을 소개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평화로운 일상은 잠시 뿐이었다. [[1839년]] [[기해박해|기해년의 박해]]로 인해 천주교인들에게 한양은 [[시골]] 지역보다 더 위험했다. 하지만, 그들은 용감하게 박해에 맞서기로 결심했다.
어느날 여성 교우 몇 명이 그 집에 모여서 [[포도청]]으로부터
물론, 그들은 배교하라는 포장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았고, 극심한 [[고문]]을 견뎠다. 그들은 계속되는 가혹한 [[형벌]]과 [[고문]]으로 쇠약해진 상태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감옥]]에서 수 주 동안을 몹시 앓았다. 그들은 [[순교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1839년]] 9월 말에서 10월 초 쯤에 감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수일 간격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며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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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분류:1782년
[[분류:1839년
[[분류:서울특별시 출신]]
[[분류: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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