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장 (통일신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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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된지 얼마 안 되어 김우징은 죽고, 태자 경응이 즉위하였다([[문성왕]]). 왕은 즉위한 해([[839년]])에 장보고를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삼고, 7년([[845년]]) 3월에야 장보고의 딸을 차비로 들이려 했지만, 신하들은 장보고의 신분을 문제삼으며 천한 바다 섬사람의 딸을 아내로 삼을 수는 없다며 반대했고 계획은 취소되었다. 이에 앙심을 품고 이듬해 봄에 장보고가 청해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에 신라 조정은 섣불리 토벌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근심하고 있었는데, 이때 염장이 "조정에서 다행히 신의 말을 들어주신다면, 신이 한 명의 군사도 수고시키는 일 없이 맨주먹으로 궁복(장보고)의 목을 베어 바치겠습니다."라며 나섰다.
 
《삼국유사》에는 염장이 청해진으로 가서 사람을 시켜 "내가 이 나라의 임금에게 작은 원한이 있기에 명공께 의지해 신명을 보전하려 한다"는 말을 전했다. 장보고는 몹시 노하며 "너희 무리들이 왕께 간언하여 내 딸을 폐하게 하고서 어찌 나를 보려고 하느냐?"라고 하자, 염장은 다시 사람을 시켜 "그것은 백관(百官)들이 간한 것이지 나는 그 논의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명공께서는 의심하지 말아 주소서."라고 전했다. 염장을 청사로 들이게 한 장보고가 다시 "경(卿)은 어쩐 일로 여기까지 왔는가?"라고 물었고, 염장은 "왕께 거스른 일이 있어 공의 막하(幕下)에 의탁해 해를 면하려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제야 의심을 푼 장보고는 염장을 환영하며 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장보고가 술에 취한 틈을 타서 염장은 장보고가 차고 있던 장검(長劍)을 빼어 그의 목을 베고 말았다. 장보고의 죽음을 본 청해진의 군사들은 저항도 하지 못하고 항복했고, 염장은 그들을 서라벌로 데리고 올라와 자신이 장보고를 죽인 것을 아뢰었다. 문성왕은 기뻐하면서 염장을 포상하고 [[아찬|아간]] 관등을 주었다. 하지만 염장은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수하인 백경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고 만다.
 
문성왕 13년(851년) 봄 2월, 신라 조정은 김양에게 군사를 주고 청해진을 없애고공격하라 명했다. 김양이 청해진에 도착하자마자 진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밤에 나타난 염장에게 주민들을속수무책으로 벽골군(碧骨郡)으로당하고 옮겼다만다.
 
=== 《속일본후기》 속의 염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