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쿠라 시게마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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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초 20년(1615년)의 [[오사카 전투|오사카 여름 전투]]에 즈음해서는, 야마토코리야마성({{lang|ja|大和郡山城}})의 구원이나, 도묘지 방면에서의 [[고토 모토쓰구]] 와의 전투의 공으로, 다음해인 [[겐나]] 2년(1616년)에 [[아리마 하루노부]]의 옛령이었던 히젠에서 전날 노에 4만 3천 석을 주어 이봉했다.
 
[[겐나]] 4년(1618년), 잇코쿠잇성(一国一城)의 제도에 따라서 종래 있던 하라성({{lang|ja|原城}})과 히노에성({{lang|ja|日野江城}})을 폐하고 시마바라성({{lang|ja|島原城}})의 축성을 개시한다. 녹봉 4만 3천 석이면서도 10만 석인 [[다이묘]]의 성에 필적하는 만큼 걸맞지 않은 규모의 성을 쌓았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가혹한 착취를 당하게 되었다. 이 때, 검지를 실시해, 영내의 이시타카를 실세의 배 가깝게 추측해, 영민의 한계를 넘는 세금을 징수했다. 시마바라성을 건축할 때 공을 세운 센지이시무라(千々石村)의 와다 시로자에몬(和田四郎左衛門) 요시나가의 호소(당부)에 의해 바닷바람에 의한 염해를 막기 위해 지다이시 해안에 제방을 쌓고 [[소나무]]를 심게 했다. 이 소나무는 지금도 [[방풍림]]으로서 천지석쵸에 남아 있다.
 
또한 막부에 대한 충성을 나타내기 위해 녹봉에 걸맞지 않은 규모의 [[에도성]] 개축의 공의 공사 공사를 도급받아, 그 비용을 염출하기 위해 가혹한 착취를 거듭했다.
 
남만 무역의 이익을 얻고 있던 시게마사는 입부 당초 [[그리스도]]를 묵인하고 있었지만, 에도 막부의 그리스도 탄압 정책에 따라 겐나 7년(1621년)이 되자 그리스도 탄압을 개시개시하였다. 처음은 완만한 것이었지만, 간에이 2년(1625년)에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에게 그리스도 대책의 허술함을 지적받자 분발해, 철저한 탄압을 개시했다. 얼굴에 길리지탄이라는 글자의 인두질을 하고 손가락을 잘라내는 등 갖은 고문을 가했으며 간에이 4년(1627년)에는 운젠지옥에서 끓는 물을 이용한 기리시탄의 고문처형을 자행하는 등 기리시탄과 연공을 바치지 못한 농민을 잔인한 고문처형한 것으로 네덜란드 상관장과 포르투갈 선장의 기록에 남아 있다. 간에이 6년(1629년)에는 나가사키 봉행·다케나카 시게요시에게 권하여 나가사키 중의 기리시탄을 운젠으로 연행하였다. 게다가 [[기리시탄]] 탄압에 대한 대응을 막부에 알리기 위해 기리시탄의 근거지인 루손을 공략할 것을 막부에 신청한다. 이에미쓰를 비롯한 막각 일부도 마음이 내켰기 때문에 선발대를 파견하는 등 원정 준비에 착수하고 이를 위한 전비를 더 많이 들였다.
 
출병 실시의 바로 앞인 간에이 7년(1630년)에 [[오바마 온천]]({{lang|ja|小浜温泉}})에서 급사했다. 향년 57세로 순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