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신학교와 원효로성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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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4월 7일]] [[신학교]] 신부들과 지방 신부들의 바램에 의하여 신학교를 건축하기로 결정하였다. [[1891년]] [[5월 6일]] 신학교 정초식이 서울의 모든 신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으며, [[1892년]] [[6월 25일]] 축성식이 있었다. 이날은 신학교의 주보인 예수 성심축일이었다. 이 건물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학교 건물이 되었다. [[1928년]] 이 신학교가 혜화동으로 이전함에 따라 이 건물은 성직자 휴양소로 사용되었다. [[1956년]] [[성심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함에 따라 이 수녀원에 양도되었다. 신학교 건물은 프랑스 외방전교회 소속 코스트신부가 설계와 감독을 하였고, 청국인이 시공을 하였다.
사용 재료인 벽돌은 용산방(龍山坊) 와서(瓦署) 부근의 벽돌 가마에서 제조되었다. 건물 전면은 적벽돌을 사용하여 단순한 의장 특징을 나타냈으며, 벽면 대부분을 큰 원형 아치창으로 처리하였는데, 이는 학교 건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건물은 명동성당 주교관과 유사한 모습인데, 이것은 설계자가 같기 때문일 것이다.
용산신학교 교사(校舍)는 1890년대 한국에 건립된 기독교 계통 교사로서 가장 규모가 크고, 단순한 외관을 가진 것으로 그 역사적 가치가 크다.
원효로성당은 용산신학교의 부속성당으로 1899년 착공하여 1902년 준공되었다. 코스트 신부가 설계하였다고 하는데, 코스트 신부는 이 건물이 착공되기 전인 1896년에 이미 별세했다. 코스트 신부가 별세 이전에 설계해 두었는지, 아니면 설계자가 다른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성당 건물은 언덕에 위치하여 성심학교에서 보면 3층, 수녀원에서 보면 2층으로 보인다. 나르텍스(narthex, 현관부), 네이브(nave, 신도석부), 트랜셉(trancept, 십자형 돌출부), 엡스(apse, 聖所部) 등 아주 간결한 평면형식이다. 정면 출입은 계단실을 거치도록 되어 있다. 외벽에는 회색벽돌과 적벽돌을 혼용하였다. 외벽을 돌아가면서 부축기둥을 세웠으며, 전면 2개의 부축기둥은 높이 돌출시켜 수직성을 강조하였다. 창문은 뾰족 아치창이다. 양식적으로는 로마네스크와 고딕양식을 절충하였다.
이 건물에는 한국 최초 신부인 김대건(金大建)의 영문 머리글자인 A. K.(Andre Kim)와 그의 생존 연대(1821~1846)가 기록되어 있고, 1942년까지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안치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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