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천량 해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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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천량 해전 ==
[[1597년]] [[음력 7월 15일]] 불리함 속에도 억지로 출동한 원균은 [[부산포]] 인근에서 20여척의 [[판옥선]]을 표류하게 해 잃어버리고, 제대로 된 지휘를 하지 않은 채ㅡ기록에 의하면 선상에서 폭음을 하였다고도 한다{{출처}}ㅡ견내량에서 삼도수군을 상륙하게 한 뒤 반격하지도 않은 채 도주했다.{{출처}}
 
이 전투에서 통제사 원균과 충청수사 [[최호]]와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상륙하지 않은 채 싸운 후 전사했으며,{{출처}} [[경상우수사]] 배설은 휘하의 판옥선을 이끌고 도주해 [[한산도]]를 정리한 후 도주하였다.
 
칠천량 해전의 대패로 조선 수군은 [[거북선]]을 포함하여 130척의 판옥선을 잃고 전면적인 패주를 함으로써 붕괴되었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전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의의를 띠고 있다. 우선 조선수군이 붕괴됨으로써 남해의 재해권이 넘어가 실질적으로 [[정유재란]]이 발발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칠천량 해전은 [[이순신]]도 [[원균]]도 거부한 작전이였음에도 수전에 문외한인 [[권율]]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 당연히 왜군에게 패배하였다.
 
== 결과와 영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