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덕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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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효성왕(孝成王)의 친동생으로 효성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742년 10월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으나 받아 들이지받아들이지 않았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zh:三國史記/卷09|본기 권9 경덕왕]] |인용문= 元年 冬十月 日本國使至 不納 (원년(742) 겨울 10월에 일본국(日本國) 사신이 이르렀으나 받아 들이지 않았다.) }}</ref> 753년 8월에도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는데, 오만하고 예의가 없었으므로 왕이 그들을 접견하지 않자 마침내 돌아갔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zh:三國史記/卷09|본기 권9 경덕왕]] |인용문= 十二年 秋八月 日本國使至 慢而無禮 王不見之 乃廻 (12년(753) 가을 8월에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는데, 오만하고 예의가 없었으므로 왕이 그들을 접견하지 않자 마침내 돌아갔다.) }}</ref> 경덕왕 때는 신라가 극성기에 달한 때로 제반 제도·관직을 당(唐) 제도로 개편하는 한편, 경덕왕 16년(757년)에 전국의 행정체제 및 행정단위의 명칭을 대개는 한자식으로 개혁하고, 행정구역을 9주 5소경으로 나누었다. (→ [[신라의 행정 구역]] 참조) .<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zh:三國史記/卷09|본기 권9 경덕왕]] |인용문= 十六年 冬十二月 改沙伐州爲尚州 領州一 郡十 縣三十 歃良州爲良州 領州一 小京一 郡十二 縣三十四 菁州爲康州 領州一 郡十一 縣二十七 漢山州爲漢州 領州一 小京一 郡二十七 縣四十六 首若州爲朔州 領州一 小京一 郡十一 縣二十七 熊川州爲熊州 領州一 小京一 郡十三 縣二十九 河西州爲溟州 領州一 郡九 縣二十五 完山州爲全州 領州一 小京一 郡十 縣三十一 武珍州爲武州 領州一 郡十四 縣四十四 良州一作梁州 (16년(757) 겨울 12월에 사벌주(沙伐州)를 상주(尙州)로 고치고 1주, 10군, 30현을 거느리게 하였고, 삽량주(歃良州)를 양주(良州)로 고치고 1주, 1소경, 12군, 34현을 거느리게 하였으며, 청주(菁州)를 강주(康州)로 고치고 1주, 11군, 27현을 거느리게 하였다. 한산주(漢山州)를 한주(漢州)로 고치고 1주, 1소경, 27군, 46현을 거느리게 하였고, 수약주(首若州)를 삭주(朔州)로 고치고 1주, 1소경, 11군, 27현을 거느리게 하였으며, 웅천주(熊川州)를 웅주(熊州)로 고치고 1주, 1소경, 13군, 29현을 거느리게 하였다. 하서주(河西州)를 명주(溟州)로 고치고 1주, 9군, 25현을 거느리게 하였고, 완산주(完山州)를 전주(全州)로 고치고 1주, 1소경, 10군, 31현을 거느리게 하였으며, 무진주(武珍州)를 무주(武州)로 고치고 1주, 14군, 44현을 거느리게 하였다.<양주(良州)를 또는 양주(梁州)로도 썼다.> }}</ref><ref>{{출처|날짜=2010-3-25|일반적으로 이를 고유의 지명을 모두 중국식으로 고친 것으로 여겨지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가령 웅천주의 한산군(韓山郡)은 백제시대의 대산군(大山郡)인데 이는 한자어인 대(大)를 오히려 고유어인 한(韓)으로 바꾼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때의 행정명의 개혁은 대개 단순히 표기법만 한문으로 고치거나 간소화한 것으로 한자명이라도 당시에는 고유명으로 그대로 읽혔다. 이는 현재의 일본에서 지명을 읽는 것과 어느정도 비슷하다.}}</ref>
 
경덕왕은 [[불교]] 중흥에도 노력하여 [[황룡사]](皇龍寺)의 종을 주조하였으며, 굴불사(堀佛寺)를 비롯하여 영흥(永興)·원연(元延)·불국(佛國) 등의 절을 세웠다. 그는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봉덕사 종을 만들게 했는데,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으며 아들인 [[혜공왕]]이 완성하였다. 이 종의 소리는 맑고, 멀리까지 들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원래 이름은 '[[성덕대왕 신종]]'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종인 동시에 [[국보]](29호)이며, 후에는 봉덕사 종으로 불렀다. 경덕왕은 [[당나라|당]]과도 활발히 교역하는 등 산업 발전에 힘써 신라의 전성 시대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