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르 하이얌: 두 판 사이의 차이

잔글 (생몰년 분류 수정; 예쁘게 바꿈)
1851년에 플라톤풍 대화록인 ≪유프라노어−젊음에 관한 한 대화≫를 자비로 발간했던 피츠제럴드는 자신이 거주하던 지역의 방언들과 고전어에 관심이 많았고, 고전 작품들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를 진지한 번역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고 또 궁극적으로 ≪루바이야트≫의 발간으로 이어진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자신보다 훨씬 나이 어린 에드워드 카우얼과의 만남이었다. 1844년에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카우얼은 18세, 피츠제럴드는 35세였다. 보기 드문 언어 재능을 지닌 카우얼은 이미 라틴어·그리스어·스페인어·페르시아어에 능통해 있었고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는 중이었다. 카우얼로부터 스페인어를 배운 지 3년 만에 피츠제럴드는 스페인 극작가 칼데론의 희곡 6편을 번역해 자비로 발간했고, 1852년 12월부터 옥스퍼드에서 카우얼에게 페르시아어 교습을 받기 시작했다. 페르시아어에 어느 정도 친숙해진 그는 1856년에 페르시아 시인 자미의 ≪살라만과 압살≫을 번역해 자비로 발간했다.
 
오마르 하이얌이 피츠제럴드의 삶 속으로 들어올 무렵 그가 이미 페르시아어를 번역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1856년 옥스퍼드대학교 보들리언도서관에서 조수로 일하던 카우얼은 하이얌의 것으로 추정되는 한 필사본을 발견했다. 그는 이 ‘아우즐리 필사본’을 베낀 작은 노트를 보냈는데, 피츠제럴드는 ‘약 500년 전의 한 쾌락주의적 불신자’인 하이얌에게 동질감을 느꼈던 것처럼 보인다. 또 같은 해 가을 인도 캘커타의 프레지던시칼리지 교수로 임명되어 아내와 함께 인도에 도착한 카우얼은 현지에서 또 다른 필사본을 발견해 그것을 베껴 쓴 후 피츠제럴드에게 보냈고, 피츠제럴드는 2년에 걸쳐 이 하이얌의 루바이들을 번역했다. 사실 자신의 페르시아어 멘토였던 카우얼이 인도로 떠나 버리고 또 얼마 후 결혼한 루시 바턴과의 불행한 결혼 생활(이듬해인 1857년 8월, 부부는 별거하기로 합의했다.)을 이어 가던 그로서는 이 번역 작업이야말로 힘겨운 시기를 견딜 수 있게 해 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피츠제럴드는 평생 동안 우드브리지에서 유복하게 살면서 독서와 외국어 공부와 번역에 전념했고, 이웃들에게는 ‘약간 얼빠진’ 괴짜로 여겨졌다. 그가 남긴 숱한 편지들은 그가 점점 떨어지는 시력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지적 호기심과 탐구심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는 벗들과의 교유를 계속하면서 가끔 런던과 다른 지역을 여행하기도 했고, 테니슨 부자는 1876년 우드브리지의 자택으로 그를 찾아오기도 했다. 그는 1883년 5월 노포크주 머튼에 거주하던 벗 크래브(시인 조지 크래브의 손자)를 방문하던 중 세상을 떠났고, 우드브리지 인근의 보울지의 교회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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