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장 (통일신라):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태그: m 모바일 웹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웹
5번째 줄:
《삼국사기》에는 [[무진주|무주]](武州) 사람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흥덕왕]](興德王)이 재위 11년인 [[836년]] 음력 12월에 승하하자, 신라 왕실 내부에서는 차기 왕위 계승을 놓고 [[김균정|균정]](均貞)과 [[희강왕|제륭]](悌隆)이 대궐에서 내전을 벌였고, 균정은 패하여 죽고 제륭이 즉위하자 균정의 아들인 우징(祐徵)은 신변에 위협을 느껴 이듬해인 희강왕 2년([[837년]]) 5월, 가솔들을 데리고 [[청해진]](淸海津)으로 가서 [[장보고]]의 비호를 받게 된다.
 
이후 희강왕이 다시 [[민애왕|김명]](金明) 등이 일으킨 반란으로 자결하고, 김명이 즉위하였다. 이에 우징은 장보고에게 병사를 내어 도와줄 것을 청했고 성공하면 차후 장보고의 딸을 비로 삼아주겠다는 약속까지 하였다. 앞서 균정의 편을 들었고 우징이 청해진에서 장보고의 비호를 받으며 민애왕에 맞서 거병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김양 (신라)|김양]](金陽)이 병사를 모아 2월에 청해진으로 왔고, 장보고는 [[정년 (신라)|정년]](鄭年)에게 군사 5천을 주어 함께 수도로 진격하게 했다. 겨울 12월에 수도 서라벌로 진격한 평동장군(平東將軍) 김양의 휘하에서 군을 통솔한 여섯 명의 장군 가운데 정년과 함께 염장(閻長)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은 무주에서 [[대구|달구벌]]을 거쳐 수도로 쳐들어가 마침내 민애왕을 잡아 죽이고, 우징을 데려다 왕으로 삼았다.
 
왕이 된지 얼마 안 되어 김우징은 죽고, 태자 경응이 즉위하였다([[문성왕]]). 왕은 즉위한 해([[839년]])에 장보고를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삼고, 7년([[845년]]) 3월에야 장보고의 딸을 차비로 들이려 했지만, 신하들은 장보고의 신분을 문제삼으며 천한 바다 섬사람의 딸을 아내로 삼을 수는 없다며 반대했고 계획은 취소되었다. 이에 앙심을 품고 이듬해 봄에 장보고가 청해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에 신라 조정은 섣불리 토벌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근심하고 있었는데, 이때 염장이 "조정에서 다행히 신의 말을 들어주신다면, 신이 한 명의 군사도 수고시키는 일 없이 맨주먹으로 궁복(장보고)의 목을 베어 바치겠습니다."라며 나섰다.
 
《삼국유사》에는 염장이 청해진으로 가서 사람을 시켜 "내가 이 나라의 임금에게 작은 원한이 있기에 명공께 의지해 신명을 보전하려 한다"는 말을 전했다. 장보고는 몹시 노하며 "너희 무리들이 왕께 간언하여 내 딸을 폐하게 하고서 어찌 나를 보려고 하느냐?"라고 하자, 염장은 다시 사람을 시켜 "그것은 백관(百官)들이 간한 것이지 나는 그 논의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명공께서는 의심하지 말아 주소서."라고 전했다. 염장을 청사로 들이게 한 장보고가 다시 "경(卿)은 어쩐 일로 여기까지 왔는가?"라고 물었고, 염장은 "왕께 거스른 일이 있어 공의 막하(幕下)에 의탁해 해를 면하려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제야 의심을 푼 장보고는 염장을 환영하며 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장보고가 술에 취한 틈을 타서 염장은 장보고가 차고 있던 장검(長劍)을 빼어 그의 목을 베고 말았다.
 
=== 드라마 해신에서 나오는 염장 ===
드라마 해신 마지막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