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교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조박사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6번째 줄:
|날짜=[[192년]]
|장소=[[한나라]] [[기주]] [[반하]]
|결과=사실상 [[원소 (삼국지)|원소]]의 승리
|교전국1=[[원소 (삼국지)|원소]]
|교전국2=[[공손찬]] <br> [[유비]]
16번째 줄:
|사상자2=
}}
'''반하 전투'''는 [[192년]] [[기주]]에서 [[원소 (삼국지)|원소]]와 [[공손찬]]이 싸운 전투로전투다. 전투에서는여기서 [[공손찬]]과대승리를 [[유비]]가거둔 승리했으나원소는 원소가이후 기주를거듭 점령해공손찬을 사실상격파하여 원소의중국의 승리였다최대 강자로 부상한다.
 
==배경==
후한말, [[어사중승]] [[한복 (사람)|한복]]은 [[동탁]]에게서 기주목으로 임명되어 그와 대립하던 발해태수 [[원소 (삼국지)|원소]]를 견제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으나, 원소가 당시 여론의 지지를 받는 것을 보자 원소의 거병을 승인해 [[반동탁연합군]]을 창설하게 한다. 하지만 자신의 보신에만 관심이 있던 한복은 동탁과 원소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며 득실을 따졌고 심지어는 원소의 군량 수송을 차단하여 원소를 위기로 몰아넣기도 했다. [[191년]] 연합군이 해체되자 한복을 증오하고 있던 원소는 [[공손찬]]을 부추겨 [[기주]]를 공격하도록 한다. 공손찬이 기주에 들어와 한복을 격파하자 지휘력을 잃은 한복은 영내의 반란과 인접세력의 침공에 시달리는데, 이때 원소가 이들을 격파,병합하여 민심을 얻고 한복을 협박하여 기주목의 지위를 양도받는다.
[[191년]] [[반동탁연합군]]의 해체 후 [[원소 (삼국지)|원소]]는 [[낙양]]에서 [[하내]]로 와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었는데 [[기주]] 자사 [[한복 (사람)|한복]]이 [[공손찬]]의 세력 확장을 막으려 [[원소 (삼국지)|원소]]에게 식량을 보낸다. 이에 [[원소 (삼국지)|원소]]는 모사 [[봉기]]의 의견으로 [[기주]]로 와 [[공손찬]]과 함께 [[기주]]의 반을 차지하자는 계책을 쓴다. [[원소 (삼국지)|원소]]는 기주성에 도착해 [[한복 (사람)|한복]]을 내쫓고 사신으로 온 [[공손찬]]의 동생 [[공손월]]을 활로 쏘아 살해한다. 이에 [[공손찬]]은 동생 [[공손월]]이 죽자 군사를 일으켜 기주로 쳐들어가고 [[원소 (삼국지)|원소]]도 군사를 일으켜 [[반하]]의 상류에서 공손찬과 맞딱드린다.
한편[[공손찬]]은 군대를 광종에 주둔시키는 한편 사촌동생 [[공손월]]을 원소와 적대하고 있던 [[원술]]에게 보내 그를 지원하게 하나 공손월은 원소군과의 교전에서 패하고 화살에 맞아 죽는다. 이에 공손찬은 군사를 일으켜 원소를 공격하는데, 그 강력한 위세는 하북에 진동하였고 이 소문을 들은 기주의 성들 중에는 호응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원소 역시 군사를 일으켜 [[반하]]의 상류에서 공손찬과 교전한다.
 
==전투 과정==
[[원소 (삼국지)|원소]]는 첫 전투에서 부하 [[문추]]를 내보내 [[공손찬]]을 무찔러 승기를 잡는다. [[공손찬]]은 [[문추]]에게 쫓겨 죽을 뻔 하다가 원소군에서 귀순해 온 장수 [[조운]]의 도움으로 살아나고 [[문추]]는 퇴각한다. 다음 날 원소군은 진격해 오는 [[공손찬]]의 백마부대를 활로 쏘아 무찌르고 [[원소 (삼국지)|원소]]의 부하 [[국의]]가 [[공손찬]]의 부하 [[엄강]]을 죽이고 [[공손찬]]을 뒤쫓는다. 이에 [[조운]]이 달려와 [[국의]]를 베고 [[공손찬]]을 구했으며 원소군을 포위한다. 그러나 원소군의 저항이 거세지고 양쪽에서 [[원소 (삼국지)|원소]]의 부하 [[문추]]와 [[안량]]이 협공을 해오자 [[공손찬]]은 위기에 빠진다. 다행히 평원 현령 [[유비]]가 도움을 주어 [[공손찬]]과 [[조운]]은 구출되고 원소군은 후퇴한다. 원소는 전투에서 패한 뒤로 영채를 굳게 지키며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고 어느덧 한 달이 지나자 [[장안]]에서는 [[동탁]]의 사위 [[이유 (삼국지)|이유]]가 건의하여 [[동탁]]에게 [[원소]]와 [[공손찬]]의 싸움을 중지시키라고 알린다. 결국 원소와 공손찬은 [[동탁]]의 건의로 싸움을 중지하고 각각 [[기주]]와 [[유주]]로 돌아간다. 그리고 [[유비]]도 [[조운]]과 만날 날을 기약하며 떠난다.
 
공손찬은 3만의 군사로 방진을 치고 기병 1만을 좌우에 배치하여 주력으로 삼았다. 한편 원소 역시 진형을 갖추고 [[국의]]와 정병 8백명을 선봉으로 삼았으며 1천의 노병을 그 뒤에 대기시켰는데. 원소의 군세가 적은 것을 본 공손찬은 이를 깔보고 기병을 풀어 공격했으나 기병대의 전술에 능숙했던 국의가 군사들을 방패 아래 엎드려 있게 하다가 공손찬의 기병대가 사정거리에 도달하자 일제히 궁노를 발사하게 해 공손찬의 기병대가 크게 무너졌고 공손찬이 임명한 기주자사 [[엄강]]이 전사했다. 기병대가 패퇴하자 공손찬은 군세를 철수시켰으나 원소가 이를 뒤쫓자 계교에서 다시 군사를 거두어 싸웠다. 하지만 여기서 공손찬은 대패하였고 공손찬이 주둔하고 있던 본영이 점령되자 남은 무리들도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한편 후방에 있던 공손찬이 완전히 격파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방심하여 안장에서 내려 말을 쉬게 하며 단지 수십명 남짓한 보병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달아나던 공손찬의 2천 기병대에게 포위당한다. 이에 원소가 분기하며 앞장서 싸우자 모두가 분발하여 싸웠고 지휘하는 자가 원소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적들은 그 기세에 눌려 차츰 밀려나다가 마침 국의가 와서 원소를 돕자 마침내 궤멸당했다.
[[분류:삼국지]]
 
 
 
[[분류:삼국지]]
[[분류:중국의 전투]]
[[분류:유비의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