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시리 카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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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Будшир хатан.jpg|섬네일|오른쪽|200px|복답실리(卜答失里) 태황태후]]
'''옹기라트 부다시리'''(弘吉剌 卜答失里 혹은 不答失里, Будашири, ? ~ [[1305년]]-[[1340년]] [[음력 6월]])는 [[원나라]]의 황후이자, 황태후로 원 문종 [[투그테무르]](图帖睦尔)의 정궁황후(재위:[[1328년]]—[[1329년]], (복위) [[1329년]]—[[1332년]])이다. 성(姓)은 [[온기라트|홍길랄]]씨(弘吉剌氏), 그녀의 부친은 노왕 조아불랄(魯王 雕阿不剌)이고, 모친은 [[원 무종]], [[원 인종]]의 누이인 노국대장공주 상가랄길(魯國大長公主 桑哥剌吉)이다. 그녀는 [[원나라]]의 유일한 [[태황태후]]였다.([[다기 (원나라)|따지]]도 원나라의 태황태후 중 하나이지만 추존 황후이므로 제외한다.) 다른 이름은 '''포다시리'''(布塔失里)이다.
 
[[1332년]] [[10월]] [[원 영종 (15대)|영종 린첸발]] 즉위기간과 린첸발 사후 황제위가 궐위가 되자, 명목상의 섭정에 앉았으나 조정 실권은 [[킵차크 한국]]의 군벌 [[엘테무르]]에게 있었다. [[1332년]] [[8월]] [[원 문종|문종 투그 테무르]]가 죽자, [[엘 테무르]]는 그녀의 차남 [[엘 테구스]]를 황제로 옹립하려 했으나 그는 선황제(문종)의 유언이라는 이유로 엘 테구스의 제위 계승을 거절, 린첸발이 즉위했다. [[12월]] 린첸발이 즉위 2개월 만에 죽자, [[엘 테무르]]는 다시 그녀의 차남 엘 테구스를 황제로 옹립하려 했으나, 역시 선황제의 유언을 이유로 거절했다. [[1333년]] [[원 혜종|투그 테무르]] 즉위 후 황태후가 되고, 차기는 엘 테구스에게 보장하는 조건으로 토곤 테무르를 즉위시켰다. [[1340년]] 토곤 테무르는 자신의 아들이 태어나자 후계자를 바꾸려 했다. 부다시리가 [[메르키트 바얀]] 등과 공모하려 엘 테구스를 추대하려 하자, [[원 혜종|혜종]]은 반역을 이유로 그녀를 폐위, 동안주로 유배보냈다가 중도에 사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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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생애 초반 ===
부다시리는 [[1305년]] [[원나라]] [[쿠빌라이 카안|세조 쿠빌라이]]의 손자 다르마발라 태자의 딸 노국휘문의복정수대장공주 상가나길(魯國徽文懿福貞壽大長公主 祥哥那吉) 혹은 상가랄길(桑哥剌吉), 상가길랄(桑哥吉剌)과 [[옹기라트]]부 노왕 동가불랄(魯王 潼坷不剌)의 딸로 태어났으며, 정확한 생일은 알려진 것이 없다. [[쿠빌라이 칸]]의 손자 [[다르마발라]]의 외손녀가 된다. [[원 무종]]과 [[원 인종]]은 그의 외삼촌이며, 남편 원 문종 투그테무르는 무종의 아들로서 그의 외사촌, 고종사촌누이 간이 된다.
 
[[투그테무르]](图帖睦尔, 문종)가 소년기 때 그와 혼인, 그가 회왕으로 가자 그를 따라 [[강남]]으로 가게 되었다. 투그 테무르와의 사이에서 아나트라나다, 구나시리(古纳答剌, 후에 [[엘 테구스]]로 개명), 타이핑누 등이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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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9년]] 쿠살라(명종)가 죽자 투그테무르가 황제로 복위, 부다시리도 [[황후]]로 복위하였다. 복위된 부다시리는 교활한 마음을 품고 자신의 심복 환관 바이주(拜住)와 함께 모략을 꾸며 쿠살라의 미망인인 [[바부샤]](八不沙)를 살해(殺害)하였다. (이 사건은 투그테무르의 세력이 쿠살라의 세력, 즉 씨를 말리는 것으로 추정된다.)
 
[[1330년]] [[8월]] [[어사대]]의 신하가 그녀의 아들 아나트라나다를 황태자로 책봉할 것을 주청, 이후 신하들이 아나트라나다의 태자 책봉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문종은 태자 책봉을 밍설였다. [[1330년]] [[10월]] 제왕과 재상들이 아나트라나다를 황태자로 책봉하라고 상소했으나 문종은 아직 어린 것을 이유로 거절하였다. 계속 된 태자 책봉 상소가 올라오자 문종은 그해 [[12월]] 생각을 바꾸어 아나트라나다를 황태자로 책봉하기로 하고, [[1330년]] [[12월 2일]](양력 [[1331년]] [[1월 18일]]) 종묘에 고하고 [[12월 5일]](1331년 양력 1월 21일) 아들을 태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아나트라나다는 [[1331년]] [[2월 22일]](음력 1월 15일)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신료들은 그녀의 둘째 아들 구나시리를 태자로 세울 것을 상소했으나, [[원 문종|문종]]은 이를 주저했다. 구나시리는 권신 [[엘 테무르]]의 집에 보내져, 엘 테구스로 이름을 바꾸고 그에 의해 양육되었다. 일설에는 [[엘 테무르]]가 엘 테구스를 양자처럼 거두었다는 설도 있다.
[[지순 (연호)|지순]] 3년([[1332년]]) [[8월]], [[투그테무르]](문종)가 [[상도 (지명)|상도]](上都)에서 사망하면서 쿠살라(명종)의 아들을 계승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권신 [[엘 테무르]](燕鐵木兒)는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 연첩고사(燕帖古思, [[엘 테구스]])를 즉위시키자고 건의하였지만 부다시리 카툰은 선왕의 유언을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엘테부르]]는 다시 [[광시 좡족 자치구|광시]](廣西)에 추방된 쿠살라의 장남인 [[토곤테무르]](妥懽帖睦爾)대신 불과 6살의 차남 [[린친발]](懿璘質班)을 선택, 즉위시켰다.
 
문종은 자신이 형을 죽게 했다는 죄책감으로 평생 괴로워했고, 자신의 뒤는 자신의 아들 대신 형 명종의 아들 중에서 지명하게 하였다. [[지순 (연호)|지순]] 3년([[1332년]]) [[8월]], [[투그테무르]](문종)가 [[상도 (지명)|상도]](上都)에서 사망하면서 쿠살라(명종)의 아들을 계승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권신 [[엘 테무르]](燕鐵木兒)는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 연첩고사(燕帖古思, [[엘 테구스]])를 즉위시키자고 건의하였지만 부다시리 카툰은 선왕의 유언을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엘테부르]]는 명종 독살의 책임을 물을까봐, 다시 [[광시 좡족 자치구|광시]](廣西)에 추방된 쿠살라의 장남인 [[토곤테무르]](妥懽帖睦爾)대신 불과 6살의 차남 [[린친발]](懿璘質班)을 선택, 즉위시켰다.
 
=== 황태후, 명목상의 섭정 시절 ===
[[1332년]], 린첸발(영종)이 황제로 즉위하자 그해 [[11월]] 부다시리는 [[황태후]]가 되었다. 부다시리는 형식적으로 섭정이었으나, 정치적 실권은 [[엝테무르]]에게 있었다. 그러나 린첸발은 황제가 된지 2개월만에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다. 부다시리는 [[광시성|광서]]에 있던 [[원 혜종|토곤테무르]]에게 사람을 보내 상경할 것을 권했다.
 
린친발이 사망하자, 엘 테무르는 다시 투그테무르의 차남 연첩고사(燕帖古思, [[엘 테구스]])를 즉위시키자고 건의하였지만 부다시리는 아들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사양했다. 엘 테무르의 권세가 커질 것을 염려한 부다시리는 그것을 거부, 린친발의 이복형 토곤 테무르를 즉위시켰다. 혹은 자기 아들이 정쟁에 휘말릴 것을 염려하여 반대하였다는 설도 있다. [[1333년]] [[2월]] 토곤 테무르는 린친발 황제의 사망 소식을 듣고 [[대도]]로 올라오려 했으나 [[엘테무르]]가 말과 수레 이용을 금지하여, 그의 상경을 저지하였다.
 
[[원통 (연호)|원통]] 원년([[1333년]]), 토곤 테무르(순제)가 즉위 함으로 인해 부다시리는 [[태황태후]]의 칭호를 받고 [[임조칭제]](临朝称制, 섭정)를 칭하는 동시, 자신의 2자인 연첩고사를 황태자로 올리자고 토곤 테무르(순제)에게 건의하였다. [[엘 테무르]]는 사망하고 그의 아들들이 제거됐지만, 조정의 실권은 [[메르키트 바얀]]에게 있었다.
 
=== 폐출과 최후 ===
[[지원 (원 혜종)|지원]] 6년([[1340년]]) [[2월]], 권신 [[메르키트 바얀|바얀]](伯顏)이 실각되고 유배가던 길에 [[광둥성|광둥]]에서 사망했다. [[메르키트 바얀]]은 자신이 조종하기 쉬운 [[엘 테구스]]를 차기 황제로 세우려 했고, 부다시리는 이에 동의하였다. [[메르키트 바얀]]의 권력이 강한 것을 두려워한 [[원 혜종|혜종 토곤테무르]]는 친정을 원했고, 이를 눈치챈 [[메르키트 바얀|바얀]]의 조카 [[토크토아]]는 혜종과 짜고 바얀을 실각시켰다.
 
그해 [[6월]] 복답실리는 자신의 2자(次子)인 황태자 연첩고사와 반역을 획책하였다는 혐의로 인해 태황태후에서 폐위(廢位), [[대도]](大都)에서 추방된 뒤, 동안주(東安州)로 유배가던 중 갑자기 사망했다. 일설에는 토곤 테무르에테무르가 인해사사했다는 사사당했다.설이 있다.
 
[[6월 14일]] [[원 혜종|혜종 토곤테무르]]는 조서를 내려 그가 [[바부샤 카툰]]을 살해한 것, 자신 대신 [[원 영종 (15대)|의린친발]]을 추대했다는 점, 자신을 [[원 명종|명종 쿠살라]]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는 등의 이유로 부다시리를 폐위한다는 조서를 발표했다. 향년 36세였다.(연첩고사는 [[고려]]에 귀향가는 도중, 살해되었다.) 복답실리가 음모를 꾸몄다는 정황은 원사, 원사연의 등 기록에 나타나지 않으며, 일설에는 이는 [[기황후]]의 공작이었다는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