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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운대'''는 조선 중기의 명신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이 살던 곳으로 '필운'은 그의 호이다. 종로구 필운동의 배화여자고등학교 뒤뜰에는 큰 암벽이 있는데, 그 왼쪽에 "필운대(弼雲臺)"라는 정자(正字)가 크게 새겨져 있고, 가운데에 시구(詩句)가 새겨져 있으며, 오른쪽에 10명의 인명이 나열되어 있다.
이항복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 외에 백사(白沙)라고도 했다. 고려말의 대학자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며 참찬 이몽량(李夢亮, 1499∼1564)의 아들이다. 뒤에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세간에서 흔히 '오성대감'이라 불렀다. 특히 죽마고우인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1613)과의 기지(機智)와 작희(作戱)에 얽힌 일화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병조판서·이조판서로서 홍문관·예문관 대제학 등을 겸임하는 등 여러 요직을 거치면서 안으로 국사에 힘쓰고 밖으로 명(明)나라 사신의 접대를 전담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때에는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호종했고, 명군(明軍)에게 도움을 청할 것을 적극 건의했으며, 명군과의 교섭에서 능란한 외교를 벌였던 인물이다. 난리 후 우의정을 지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선정되었다.
암벽 왼쪽의 "弼雲臺" 글씨는 누구의 것인지 미상이나 이항복의 글씨라기 보다는글씨라기보다는 이유원의 글씨로 추정된다. 암벽 가운데 새겨진 시구(詩句)는 이항복의 후손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고종 10년(1873) 이곳에 들러 조상의 자취를 보고 느낌을 적은 것으로 이유원의 장기인 예서(隸書)로 새겨져 있다.
 
또한 암벽 오른쪽에는 "동추(同樞) 박효관(朴孝寬)" 등 10명의 인명이 새겨져 있는데, 이유원과 관련된 인물인지는 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