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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양씨'''(濟州 梁氏)는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탐라]]개국설화에(耽羅) 등장하는개국군왕(開國郡王) [[양을나]](良乙那)이다.
 
== 기원 ==
제주 양씨는 [[탐라]]개국설화에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세 신인(神人) 중의 한 명인 '''[[양을나]]'''(良乙那)를 시조로 한다. 《[[고려사]](高麗史)》 고기(古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72894 『고려사』 권57, 지제11, 지리(地理)2]</ref>
 
{{인용문|태초(太初)에 사람이 없었는데, 세 신인(神人)이 한라산 북쪽 기슭 모흥혈(毛興穴)로부터 솟아 나왔다. 맏이는 [[양을나]](良乙那), 그 다음을 [[고을나]](高乙那), 셋째는 [[부을나]](夫乙那)라고 했는데 세 사람은 수렵을 하면서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었다. 어느날 나무 상자가 동쪽 바닷가로 떠내려 온 것을 발견하고 나가서 열어 보니 그 안에 석함(石函)이 있고 붉은 띠에 자줏빛 옷을 입은 사자(使者) 한 사람이 따라와 있었다. 석함을 여니 푸른 옷을 입은 세 처녀와 구독(駒犢; 망아지와 송아지 등 가축)과 오곡(五穀)의 종자가 있었다. 사자(使者)가 "우리는 일본국(日本國)의 사신입니다. 우리 왕이 세 왕녀를 낳고 말하기를 「서해(西海)의 중악(中嶽)에 신자(神子) 세 사람이 내려와 장차 나라를 열고자 하나 배필이 없구나」 하고는 저에게 분부하여 세 딸을 모시고 여기에 오도록 한 것입니다. 마땅히 배필로 삼아 대업(大業)을 이루십시오."라고 말한 후 홀연히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세 사람이 나이 순서에 따라 세 여자를 나누어 아내로 삼고서, 샘이 달고 땅이 비옥한 곳으로 가서, 화살을 쏘아 땅을 점치고는 [[양을나]]가 사는 곳을 제일도(第一都)라 하였고, [[고을나]]가 사는 곳을 제이도(第二都)라 하였으며, [[부을나]]가 사는 곳을 제삼도(第三都)라 하였다. 처음으로 오곡을 파종하고 가축을 길러 나날이 부유하고 자손이 번성하게 되었다.
삼성혈 전설에 의하면 탐라(제주의 옛 이름) 한라산 북쪽 기슭 모흥혈(毛興穴)에서 세 신인이 솟아났다. 양을나, [[고을나]](高乙那), [[부을나]](夫乙那)라는 이름을 가진 그들은 수렵을 하여 살았는데, 하루는 바다에 이상한 상자가 떠내려와 건져 보니 세 미녀와 오곡의 종자, 망아지, 송아지가 들어 있었다. 세 신인은 세 미녀와 각각 결혼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되니 그로부터 탐라는 개척되었다.
15대손에 형제 세 사람이 신라에 조회하니 왕이 큰아들을 성주(星主)라 부르고, 둘째 아들을 왕자(王子)라 불렀으며, 막내아들을 도내(都內)라 불렀다. 읍호(邑號)는 탐라(耽羅)라 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왔을 때 처음 탐진에 정박하였기 때문이다. 각기 보개(寶盖)와 의대(衣帶)를 하사하고 돌려보냈다. 자손이 번성하면서 고(高)씨가 성주(星主)가 되고, 양(良)씨가 왕자(王子)가 되며, 부(夫)씨가 도상(徒上)이 되었다. 후에 양(良)을 양(梁)으로 고쳤다.}}
 
고려사 고기(高麗史 古記)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탐라는 남해 가운데 있다. 처음에는 사람이 없었는데 삼신인이 땅에서 솟아나니 맏이를 양을나, 버금을 고을나, 셋째를 부을나라 하였다. 三人은 거친 들판을 돌아 다니며 사냥하여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살았다. 한 나무 상자가 동쪽 바닷가로 떠내려 온 것을 발견하고 나가서 열어 보니 그 안에 또 석함(石函)이 있고 붉은 띠에 자줏빛 옷을 입은 사자(使者)가 한 사람 따라와 있었다. 석함을 여니 푸른 옷을 입은 처녀 3人 및 망아지 송아지와 오곡 씨앗 등 여러가지가 있었다. 이에 사자(使者)가 말하기를 "나는 벽랑국 사신입니다. 우리 왕이 이 3왕녀를 낳고 이르되 서해 한가운데 있는 산에 신자(神子) 3人이 강생(降生)하여 장차 나라를 세우려는데 배필이 없다 하시고 이에 신(臣)에게 명하여 3왕녀를 모시게 하였습니다. 마땅히 배필로 삼아 대업(大業)을 이룩하시옵소서"하고 홀연히 구름을 타고 떠나가 버렸다. 3人은 나이 차례로 나누어 배필을 삼고 샘물이 달며 땅이 기름진 곳에 나아가서 활을 쏘아 터를 정하니 良乙那가 사는 곳을 제일도(第一徒), 高乙那가 사는 곳을 제이도(第二徒), 夫乙那가 사는 곳을 제삼도(第三徒)라 하고 비로소 오곡을 파종하고 또한 망아지와 송아지를 기르니 날로 부유하고 번영하였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72894 『고려사』 권57, 지제11, 지리(地理)2]</ref>
 
東國通鑑(동국통감)은 성종15년(1484) 간행되어 長曰良(장왈양)이라 하고 長爲良說(장위양설)이 굳어졌으며, 이후에도 살펴보면 효종4년(1654)에 李元鎭(이원진)牧使(목사)도 三姓穴條(삼성혈조)에 良高夫(양고부)라고 썼고 숙종29년(1703)에 李衡祥(이형상)牧使(목사) 역시 三姓祠 上樑門(삼성사 상량문)에 良高夫(양고부)로 썼다. 이때 사우(祠宇)를 완성하고 삼신인(三神人)의 위패(位牌) 순위를 정함에 있어서 삼성신인 강생(三姓神人 降生)의 사적문헌과 국사를 널리 상고(詳考)한 끝에 양을나(良乙那)를 제1위에 모시고 고을나(高乙那)를 제2위에, 부을나(夫乙那)를 제3위로 결정한 후 제문(祭文)을 지어 위패(位牌)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었다. 王朝實錄(왕조실록 42~P.163)에 의하면 영조5년(1771)에 高漢俊(고한준)등이 主上(주상)께 奏請(주청)하는 상소문에도 良高夫(양고부)로 썼다. 또한 李丙燾(이병도)著의 韓國史(한국사)에도 良高夫(양고부)요, 金泰能(김태능)著의 濟州島史論攷(제주도사논고)에도 良高夫(양고부)라 했으며 國史大事典(국사대사전)·한국사대사전 등에도 良高夫(양고부)라고 기록하였으며, 玄容駿(현용준)著 「濟州島神記(제주도신기)」에도 良高夫(양고부)라 수록되어 있다.
 
==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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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 ==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린 해동안홍기(海東安弘記)에 구한(九韓)을 열거하였는데 탁라(乇羅)가 네 번째에 있다. 476년에 [[백제 문주왕]](文周王)이 탐라국(耽羅國) 사자(使者)에게 은솔(恩率)이란 벼슬을 주었다. [[백제]]가 망하니, 661년(문무왕 원년) 탐라 국주(耽羅國主) 좌평(佐平)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신라에 항복하였다. 1105년(고려 숙종 10년) 탁라를 탐라군(耽羅郡)으로 개칭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da_40007005 세종실록 151권, 지리지 전라도 제주목]</ref> 1416년(조선 태종 16년) 제주목(濟州牧)이 설치되어 전라도에 속했다. 1946년 제주도(濟州道)로 승격하였고, 2006년 [[제주특별자치도]]로 승격되었다.
제주목(濟州牧) : 본주(本州)는 전라도의 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 그 주(州)의 고기(古記)에 이르기를,"태초(太初)에는 사람과 물건이 없었는데, 신선[神人] 세 사람이 땅으로부터 솟아나왔다. 지금도 주산(主山) 북쪽 기슭에 ‘모흥(毛興)’이라 하는 구멍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곳이다. 맏을 양을나(良乙那), 둘째를 고을나(高乙那), 세째를 부을나(夫乙那)라고 하였다.
 
==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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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팽손]](梁彭孫, 1488년 ~ 1545년) : 1516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정언(正言)·전랑·교리(校理), 용담현령(龍潭縣令) 등을 역임했다.
* [[양응정]](梁應鼎, 1519년 ~ 1581년) : 1552년(명종 7)·1556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선조 때 [[공조]][[참판]]과 대사성을 역임하였다.
* [[양천운]](梁千運, 1568년 ~ 1637년) : 사마시에 합격하여 벼슬은 동몽교관(童蒙敎官 )·감찰(監察 ) 등을 거쳐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를 지냈다.
* [[양기탁]](梁起鐸, 1871년 ~ 1938년) : 1904년 <대한매일신보> 창간, 1907년 신민회 조직, 193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주석
* [[양세봉]](梁世奉, 1896년 ~ 1934년) : 조선혁명군 제1중대장
* [[양회경]](梁會卿, 1912년 ~ 1998년) : 대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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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상가리
*[[광주광역시]]
*[[전라남도]] [[나주시]] 공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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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142,211명
 
== 같이양고부 보기서열 분쟁 ==
제주 양씨, [[제주 고씨]], [[제주 부씨]] 3성 순서는 고서마다 달리 표기됐다. 1281년 《[[삼국유사]]》, 1451년 《[[고려사]]》, 1454년(단종 2년) 《[[세종실록지리지]]》, 1484년 《[[동국통감]](東國通鑑)》, 《탐라기년》에는 양고부(良高夫) 순으로 쓰여 있지만, 영주지와 탐라지는 '고양부'로 쓰고 있다.
*[[제주 고씨]]
 
*[[제주 부씨]]
東國通鑑1484년(동국통감)은성종 성종15년(148415년) 간행되어간행된 동국통감은 長曰良(장왈양)이라 하고 長爲良說(장위양설)이 굳어졌으며, 이후에도 살펴보면굳어졌다. 1654년(효종4년(1654)에 이원진(李元鎭(이원진) 목사(牧使(목사)도 삼성혈조(三姓穴條(삼성혈조)에 良高夫(양고부)라고 썼고, 숙종29년1703년(1703숙종 29년)에 이형상(李衡祥(이형상) 목사(牧使(목사) 역시 삼성사(三姓祠) 상량문(上樑門(삼성사 상량문)에 양고부(良高夫(양고부)로 썼다. 이때 사우(祠宇)를 완성하고 삼신인(三神人)의 위패(位牌) 순위를 정함에 있어서 삼성신인 강생(三姓神人 降生)의 사적문헌과 국사를 널리 상고(詳考)한 끝에 양을나(良乙那)를 제1위에 모시고 고을나(高乙那)를 제2위에, 부을나(夫乙那)를 제3위로 결정한 후 제문(祭文)을 지어 위패(位牌)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었다올렸다. 王朝實錄(왕조실록영조실록에 42~P.163)에의하면 의하면영조 영조5년5년(1771)에 고한준(高漢俊(고한준) 등이 主上(주상)께 奏請(주청)하는주청하는 상소문에도 良高夫(양고부)로 썼다. 또한 李丙燾(이병도)著의 韓國史(한국사)에도 良高夫(양고부), 金泰能(김태능)著의 濟州島史論攷(제주도사논고)에도 良高夫(양고부)라 했으며 國史大事典(국사대사전)·한국사대사전 등에도 良高夫(양고부)라고 기록하였으며, 玄容駿(현용준)著 「濟州島神記(제주도신기)」에도 良高夫(양고부)라 수록되어 있다.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