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양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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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142,211명
 
== 양고부 서열 분쟁논란 ==
제주 양씨, [[제주 고씨]], [[제주 부씨]] 3성 순서는 고서마다 달리 표기됐다. 1281년 《[[삼국유사]]》, 1451년 《[[고려사]]》, 1454년(단종 2년) 《[[세종실록지리지]]》, 1484년 《[[동국통감]](東國通鑑)》, 《탐라기년》에는 양고부(良高夫) 순으로 쓰여 있지만, 영주지와 탐라지는 '고양부'로 쓰고 있다.
 
1484년(성종 15년) 간행된 동국통감은 長曰良(장왈양)이라 하고 長爲良說(장위양설)이 굳어졌다. 1654년(효종4년)에 이원진(李元鎭) 목사(牧使)도 삼성혈조(三姓穴條)에 良高夫(양고부)라고 썼고, 1703년(숙종 29년)에 이형상(李衡祥) 목사(牧使) 역시 삼성사(三姓祠) 상량문(上樑門)에 양고부(良高夫)로 썼다. 이때 사우(祠宇)를 완성하고 삼신인(三神人)의 위패(位牌) 순위를 정함에 있어서 삼성신인 강생(三姓神人 降生)의 사적문헌과 국사를 널리 상고(詳考)한 끝에 양을나(良乙那)를 제1위에 모시고 고을나(高乙那)를 제2위에, 부을나(夫乙那)를 제3위로 결정한 후 제문(祭文)을 지어 위패(位牌)를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 영조실록에 의하면 영조 5년(1771)에 고한준(高漢俊) 등이 主上(주상)께 주청하는 상소문에도 良高夫(양고부)로 썼다. 또한 李丙燾(이병도)著의 韓國史(한국사)에도 良高夫(양고부), 金泰能(김태능)著의 濟州島史論攷(제주도사논고)에도 良高夫(양고부)라 했으며 國史大事典(국사대사전)·한국사대사전 등에도 良高夫(양고부)라고 기록하였으며, 玄容駿(현용준)著 「濟州島神記(제주도신기)」에도 良高夫(양고부)라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