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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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사사화 ===
{{참고|을사사화}}
[[조선 성종|성종]] 때 싹튼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의 대립은 [[조선 연산군|연산군]] 대의 [[무오사화]]·[[갑자사화]], [[조선 중종|중종]]대의 [[기묘사화]]로 나타나면서 단순히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의 대립 차원을 넘어 양반관료층의 분열과 권력투쟁으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명종의 즉위는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조선 중종|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조선)|장경왕후]] 윤씨 소생의 세자 호(훗날의 인종)를 왕위에 앉히려는 외척 [[윤임]] 일파의 대윤(大尹)과, 문정왕후 소생의 경원대군을 즉위시키려는 [[윤원형]] 일파의 소윤(小尹) 사이에서 왕위계승을 둘러싼 암투는 [[중종]] 말년부터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544년 인종의 즉위를 계기로 윤임 일파가 권력을 장악하자 [[이언적]](李彦迪) 등 사림들이 정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종이 경원대군에게 [[선위]]하고 경원대군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윤원형]] 일파의 소윤이 권력을 장악하여 대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숙청은 윤임이 중종의 여덟째 아들인 [[봉성군]]을 왕으로 삼으려 한다는 윤원형의 탄핵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문정왕후는 윤임·유관(柳灌) 등을 사사하고 [[봉성군]]·[[이언적]]·[[노수신]] 등을 유배시켰다. 그뒤에도 반대파에 대한 숙청이 계속되어 [[을사사화]] 이래 6년 동안 1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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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묘왜변과 비변사의 상설기구화 ===
{{참고|을묘왜변|비변사}}
1555년 세견선(歲遣船)의 감소로 곤란을 겪어온 왜인들이 전라도 지방을 침입한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이에 1510년(중종 1010년) [[삼포왜란]] 때 설치되어 임시기구로 존속해오던 군사기관인 [[비변사]]가 상설기구로 되어, 청사가 새로 마련되고 관제상으로도 정1품 아문의 정식아문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비변사는 군사문제를 총괄하는 관청으로서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비변사 기능의 강화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전쟁수행을 위한 최고기관으로서 정치·경제·군사·외교 등 군국사무 전반을 처리하면서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최고권력기관으로서의 역할은 조선 후기(조선의 26대 임금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즉위 후 [[흥선대원군]]의 섭정 전)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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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대개 윤원형을 지칭한 것이었다.
 
:이 말이 마침내 누설되어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에게 알려졌는데 문정왕후가 이를 크게 꾸짖어
:‘나와 [[윤원형]]이 아니었다면 주상에게 어떻게 오늘이 있었겠소?’ 하니,
:상이 감히 할말이 없었다.|《[[명종실록]]》 31권,<br>명종 20년(1565년 명 가정(嘉靖) 44년) 11월 18일 (신해)|align=center}}{{인용문|&nbsp;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는 스스로 '''명종'''(明宗)을 부립(扶立)한 공이 있다 하여 때때로 주상에게
:때로 주상에게
:‘너는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으랴.’ 하고,
:조금만 여의치 않으면 곧 꾸짖고 호통을 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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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의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김없이 받들었으나
:때로 후원(後苑)의 외진 곳에서 눈물을 흘렸고 더욱 목놓아 울기까지 하였으니,
:더욱 목놓아 울기까지 하였으니,
:상이 심열증(心熱症)을 얻은 것이 또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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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후 ===
[[1567년]] [[음력 6월 27일]], 병이 위독하여 대신들이 [[경복궁]] 양심당에 입사하였으나 명종은 이미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이미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있었다. 다음날인 [[음력 6월 28일]] [[축시]](오전 1시~3시)에 [[이질]]과 그동안 지속되어 온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경복궁]] 양심당에서 승하하였다.
 
아들 [[순회세자]]가 요절하였기 때문에 중종의 서자인 [[덕흥대원군|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을 양자로 입적하여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묘호는 '''명종'''(明宗)이며, 명종 자신의 유지에 따랐다.<ref>이 내용은 《선조수정실록》에만 나온다</ref>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강릉(康陵)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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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한 뒤에도 오히려 외척을 믿고 환관을 가까이하여 정치가 날로 문란해지더니,
:끝내는 다행히 깨달아서 [[이양이량 (조선)|이량]](李樑)과 [[윤원형]](尹元衡)의 무리를 내쳤으므로
:국가가 다시 안정되었다.|《[[명종실록]]》 3권, 총서|align=center}}{{인용문|&nbsp;
:아아, 상('''명종''')께서는 총명하고 예지의 덕이 있었는데도 국가에 베풀지 못했다.
:상('''명종''')이 어릴 때 즉위하여 천자(天資)가 영명하였으니
:아아, 상께서는 어둡거나 탐혹 잔인한 잘못이 없었는데도 백성들에게 해를 끼쳤다.
 
:상이 군자(君子)를 쓰려고 하면 소인(小人)이 자기를 해칠까 두려워 죽여 버리고,
:소인을 제거하려고 하면 소인이 자기에게 붙좇는 것을 이롭게 여겨서 서로 이끌어 나왔다.
 
:아아, 상이 재위한 20년 동안 덕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였고,
:나라에 해를 끼친 것은 모두 소인들의 소행인데도 잘못은 모두 상에게로 돌아갔다.
 
:아아, 상의 말년에는 전날의 잘못을 뉘우쳐 권간을 제거하고
:여러 현인을 신원 석방하여 말년의 효과를 거두게 되었는데,
:하늘이 나이를 빌려주지 않아 갑자기 훙서하시어
:사방과 후세로 하여금 다만 상의 실덕(失德)만 알게 하고
:상의 성덕(聖德)이 일식(日蝕)이 끝나면 다시 밝아진 것과 같이
:우러러볼 만하다는 것은 알지 못하게 했다.
 
:말과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피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림을 깨닫지 못하겠다.
:아아, 슬픈 일이다. 아, 불행한 것은 오직 상뿐인저.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文定王后)를 어머니로 두었고 [[윤원형]](尹元衡)을 신하로 두어
:어머니는 불선(不善)을 가르치고 신하는 그 가르침에 순순히 따랐다.
 
:아아, 상이 요순(堯舜)처럼 훌륭한 임금이 되지 못한 것은
:상하의 보좌와 교도가 없었기 때문이니,
:아아, 슬픈 일이다.|《[[명종실록]]》 3권, 총서|align=center}}{{인용문|&nbsp;
:상('''명종''')이 어릴 때 즉위하여 천자(天資)가타고난 자질이 영명하였으니
:보도하는데 올바른 사람이 있고 훈적(訓迪)하는데 바른 방법이 있었다면
:좋은 교화를 일으키고 훌륭한 다스림을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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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시(國是)가 조금 정해지고 사기(士氣)가 조금 진작되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font color|red|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 하겠다.<br><br>|《[[명종실록]]》 34권,<br>명종 22년(1567년 명 가정(嘉靖) 46년) 6월 28일 (신해)|align=center}}<br />
 
== 가족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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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자 ===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 colspan="2" |군호작호
!이름
!생몰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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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7" |
|-
|<small>'''양자'''</small>
| style="background:#FFE4E1" |'''[[조선 선조|선조대왕]] 宣祖大王'''<br><small>하성군 河城君</small>
|연 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