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플랑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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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tadtfriedhof Göttingen Max Planck Familie.jpg|섬네일|괴팅겐에 있는 플랑크의 묘지]]
1938년 플랑크는 80세 생일을 맞았다. 물리학회(DPG)는 축하 행사를 열었고, 이 기간 동안 막스 플랑크 메달(DPG가 1928년에 설립한 최고 메달)이 프랑스 물리학자 [[루이 드 브로이]]에게 수여되었다. 1938년 말, 프로이센 아카데미는 남아 있던 독립성을 상실하고 나치나치에 의해 인수되었다([[w:Gleichschaltung|조정일체화<sub>Gleichschaltung</sub>]])에 의해 인수되었다. 플랑크는 회장직을 사임하면서 항의했다. 그는 계속해서 자주 여행을 다니며 종교와 과학에 관한 연설을 비롯한 수많은 공개 강연을 했으며, 5년후에 그는 [[알프스]]의 3,000미터 봉우리들을 오를 정도로 충분히 건강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베를린에 대한 연합군의 폭격 임무가 늘어나면서 플랑크와 그의 아내는 일시적으로 도시를 떠나 시골에 살게 되었다. 1942년에 그는 "내 안에 이 위기를 견디고 새로운 도약의 시작인 전환점을 목격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살고 싶은 열망이 커졌다."고 기록하였다. 1944년 2월 베를린에 있는 그의 집은 공습으로 완전히 파괴되어 그의 모든 과학 기록과 서신이 말소되었다. 그의 시골 은퇴는 양측에서 연합군의 급속한 진격으로 위협을 받았다.
 
1944년 플랑크의 아들 [[w:Erwin Planck|에르빈]]은 7월 20일 히틀러 암살을 시도한 [[7·20 음모]]로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재판을 받고 1944년 10월 [[인민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에르빈은 1945년 1월 베를린의 [[w:Plötzensee Prison|플로트젠제<sub>Plötzensee</sub>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그의 아들의 죽음으로 플랑크는 삶에 대한 의지를 상당부분 상실했다. 전쟁이 끝난 후 플랑크의 두 번째 아내와 그의 아들은 [[괴팅겐]]에 있는 친척에게 갔는데 플랑크는 1947년 10월 4일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의 무덤은 괴팅겐의 '구 시립묘지<sub>Stadtfriedhof</sub>'에 있다.
 
 
== 종교적 견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