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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년에 밝혀진 새로운 사실 ====
이를 통설을 뒤집는 새로운 사료로써 《삼괴황량발서요》(三槐荒涼抜書要)<ref name="group">나카야마 다다치카(中山忠親, 1131~1195)의 일기 《산괴기》(山槐記), 후지와라노 스케스에(藤原資季)의 일기 《황량기》(荒涼記)에서 관직 임명 ・ 여러 연중행사 ・ 그밖의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발췌한 것. 《산괴기》 발췌 기사의 경우 후지와라노 사다요시(藤原定能)의 기사가 많고 스케스에가 사다요시의 손자임을 감안할 때 편자는 사다요시나 스케스에의 자손일 가능성이 있다.</ref>에 실린 《산괴기》(山槐記) 겐큐 3년(1192년) 7월 9일조 및 12일조에 요리토모의 정이대장군 임관 경위를 기술한 것이 있다. 여기에 따르면 요리모토가 바란 것은 「전임 우부(우대신)」(前右府)라는 호칭 대신 「대장군」으로이며, 이를 수락한 조정이 「총관」(惣官), 「정동대장군」, 「정이대장군」, 「상장군」 네 가지 후보가후보를 제안되어제안했고, 검토한 결과 예전 헤이케의 마지막 도료였던 [[다이라노 무네모리]](平宗盛)가 임관했던 「총관」이나 요시나카가 임관했던 「정동대장군」은 흉한 전례라 하여 배제되고배제하고, 「상장군」도 일본에서는 그 선례가 없다 하여없으니 배제,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가 임관했던 「정이대장군」이 길한 전례라 하여 요리토모를 「정이대장군」으로 임관하게 되었다는했다는 것이다. 즉 요리토모에게 있어요리토모에게서 중요한 것은 「정이」(征夷)가 아니라 「대장군」(大將軍)으로 조정이 소거법에 따라 「정이대장군」을 선택한 것이 분명해졌다분명하다. 때문에 요리토모가 「정이대장군」을 바랬다는바랐다는 전제에서 「정이」에 중점을 두는두고서 해석에해석한 따르던그동안 그동안의 연구는 재고되어야재고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동시에 요시나카가 임관한 것도 아즈마카가미 등에 전하는 「정이대장군」이 아니라 교쿠요玉葉에 나오는 「정동대장군」이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분명하다)<ref>사쿠라이(櫻井), 2004년.</ref>
 
요리토모가 '대장군'을 원한 이유로는 10세기 - 11세기 진수부 장군을 조상에 두고 있는 사다모리류 헤이시(貞盛流平氏) ・ 요시후미류 헤이시(良文流平氏) ・ 히데사토류 후지와라 씨(秀郷流藤原氏) ・ 요리요시류 겐지(頼義流源氏) 등이 진수부「장군」의 후예라는 점을 그들의 정체성으로 삼고 있었기에 사다모리류 헤이시 일문(헤이케 포함) ・ 히데사토류 오슈 후지와라 씨 ・ 요리토모 자신과 같은 요리요시류 겐지의 미나모토노 요시나카 ・ 미나모토노 유키이에(源行家) ・ [[미나모토노 요시쓰네]] 등 진수부「장군」의 후손들의 패권 다툼을 제압해 유일한 무문(武門)의 도료가 되어 [[오슈 전투]](奥州合戦)에 있어서도 의식적으로 진수부「장군」 미나모토노 요리요시의 후계자라는 점을 과시했던 요리토모가 자신의 지위를 상징하는 것으로써 무사 사회에 있어서 진수부「장군」을 뛰어넘는 권위로써 「대장군」의 칭호를 바랬다는 설도 제기되었다. 또한 장군직이 무가에 있어서는 전투를 지휘통제하는 지위로 중시되어 이러한 점들을 아우르는 「대장군」이 무문의 도료로써 지휘통제하기에 중요했다는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