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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1889년 [[고베역]]까지 전통(全通)하는 관선철도 [[신바시역]]과 사설철도인 [[닛폰철도]]의 [[우에노역]]을 잇는 고가철도의 설계가 [[도쿄시]]구개정계획에 의해 입안되어 1896년 제9회 [[제국의회 (일본)|제국의회]]에서 이 신선(新線)의 도중에 '''중앙정차장'''(中央停車場)을 건설하는 것이 가결되었다. 시공은 [[오바야시구미]]가 담당. [[일로전쟁]] 종결 후인 1908년부터 건설 공사가 본격화하여 1914년 12월 20일 개업하였다. 중앙정차장은 [[황거]]의 정면에 설치되어 '''도쿄역'''이라고 이름되게 되었다.
[[1896년]] 건설이 가결되었으나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등으로 늦어지다가 [[1908년]]부터 본격화하여 [[1914년]] [[12월 18일]] 완성되었다.
 
=== 건설 ===
독일에서 초빙되어 일본의 철도건설을 지도하던 기술자 [[프란츠 발처]]에 의하여 역의 위치며 규모, 구내의 배치가 결정되었다. 역사는 번화가가 있는 동편(현재의 야에스(八重洲) 쪽)이 아니라 육군의 연병장 적지(跡地)였던 서편(현재의 마루노우치 쪽)으로 결정되었다. 황거의 정면과 대치하게 되었기에 국가적으로 상징적인 위치에 자리케 되었다. 플랫폼은 벽돌쌓기의 고가식 4면 8선으로 [[신바시역]]까지 복복선의 고가교가 계획되었다. 동편에는 [[화차조차장]]이 설치되게 되었다(후에 차량기지로 변경). 프란츠는 일본풍의 역사를 제안하였으나, 일본 측에서 반대 의견이 많아 프란츠의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역사는 [[다쓰노 긴고]]와 [[가사이 만지]]가 설계하여 [[사이타마현]] [[후카야시]]로부터 수송된 벽돌과 철근으로 된 3층 규모에 총건평 9,545m<sup>2</sup>, 길이 330m의 호장화려(豪壮華麗)한 양식건축이다. 남북으로 각각 돔 형태의 지붕이 있으며, 당시에는 마루노우치 남구가 승차구, 마루노우치 북구가 하차구로 분리되어 사용되고 있었다. 중앙현관은 황실의 전용이 되어 규모는 비록 작아도 세밀한 장식이 곳곳에 베풀어져 있었다. 중앙현관과 동서의 일반출입구의 사이에는 각각마다 1개씩 따로 출입구가 있었으나 이것은 화물의 반입반출구로서 마련되어 있던 것이었다. 개업년인 1914년은 [[제1차 세계대전]]의 개전년이었으므로 [[칭다오 전투]]를 지휘한 [[육군사령관]] [[가미요 미쓰오미]] 중장이 개선하여 황거에 입궐하는 이벤트에 맞춰서 개업식이 이루어졌다.
 
[[암스테르담 중앙역]]이 당 역사를 설계하는 도중 모델이 되어줬다는 설이 있으나 1988년 이후 [[후지모리 데루노부]] 등을 비롯한 서양건축연구자에 의해 설계자의 계보며 건축양식의 양면을 분석한 결과 부정적인 의견 역시 들려오고 있다. 다쓰노는 영국유학의 경험이 있으며 수도 런던의 터미널 역을 참고로 했을 가능성이 있다.
 
=== 발전 ===
1919년 3월 1일 중앙본선이, 1925년 11월 1일 도호쿠 본선의 전차선(현재의 [[게이힌 도호쿠선]])이, 1928년에는 같은 도호쿠 본선의 열차선(현재의 [[우쓰노미야선]])이 설치되어 이듬해 1929년 12월 16일에는 동측에 [[야스에바시]](八重洲橋, 현재의 야스에구치)가 개설되는 등 서서히 터미널 역으로서의 모양을 차리게 되었다.
 
1923년 에는 관동대진재로 재해를 당했으나 큰 피해는 없었고 1935년과 1940년의 [[만주국]] 황제 [[푸이]]의 내일을 맞이하여 [[쇼와 천황]]이 출영을 나간 한편 [[찰리 채플린]]의 도쿄 내방이며 1938년의 [[히틀러 유겐트]]의 내일 등에 있어 도쿄의 현관구로서 기능하였다.
 
=== 전재와 부흥 ===
이후 [[1921년]] [[하라 다카시|하라 다카시 암살 사건]], [[1930년]] [[하마구치 오사치|하마구치 오사치 저격 사건]] 등의 사건이 벌어졌고 [[1943년]]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의 [[도쿄 대공습]]으로 소실되었다가 [[1947년]] 응급 복구를 시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