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응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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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에는 이상을 꺾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관직을 버린 것으로 적혀 있다.
 
[[1903년]]에 다시 외부 번역관으로 관직에 오른 뒤, [[의정부]]를 거쳐 [[1907년]]에는 탁지부 사세국장과 수도국장을 지냈다. 1908년 문관전고소(文官銓考所) 위원<ref>{{웹 인용 |url= http://db.history.go.kr/url.jsp?ID=jw_1908 |제목= 대한제국 직원록 1908년 (02. 내각 > 문관전고소) |확인일자=2008-11-18 |형식= |작품명=한국사데이터베이스 }} </ref>을 역임하였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당시 품계는 종2품이었다. 이 기간 중 [[보성전문학교]]의 [[경제학]] 강사를 맡았으며, 《재정학》, 《경제학》과 같은 경제학 교재도 집필하여 서구 경제학을 도입하는데도입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일 병합으로 [[조선총독부]] 체제가 출범한 뒤 곧바로 [[전라남도]] 참여관으로 발탁되었다. [[1918년]]에는 [[강원도]] 지사, [[1921년]]에는 전라남도 지사로 승진하였다. 원응상이 전남지사를 맡고 있을 때 [[암태도 소작쟁의]]가 발생하여 이 사건의 주무 관료였다.<ref>{{서적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