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공주 (고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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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조된 묘지석인 '김은열 묘지명'을 바탕으로 정사 및 금석문에는 나타나지도 않는 인물을 기술하고 있음( '김은열 묘지명' 원문에 제2자 김굉과 제4자 김은열은 낙랑공주 왕씨 소생이라 기록하고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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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경주 김씨]] 일문에서는 《신라경순왕전비문》을 재차 왜곡하여 [[죽방 부인|전비 박씨]] 소생의 [[마의태자|태자]]의 이름을 '일'(鎰)이라 하고, 둘째 왕자를 '황'(湟)이라 하며, 셋째 왕자가 명종(鳴鍾)이며 영분공(永芬公) 시호를 받았다고 하는 등 가필(加筆)을 심하게 하였다. 그러나 정작 《김은열 묘지명》 원본에는 2자 황(湟)과 4자 은열(殷說)은 [[고려 태조]]의 외손인 [[낙랑공주 (고려)|낙랑공주 왕씨]] 소생으로 [[고려]]조에 평장사를 지내고, 나라에 공(功)이 있는 신하여서 특별히 장지(葬地)까지 하사해 주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김은열 묘지명》등은 정사(正史)에 뒷받침 되지 않은 내용으로 조선 후기 족보 편찬 과정에 위조(僞造)된 지석(誌石)을 바탕으로 가탁(假託) 내지 조작(造作)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 자녀 (추정
▲** 1자 : 김일(金鎰) - 전(傳)마의태자(麻衣太子) [[부령 김씨|부령(부안) 김씨]]· [[통천 김씨]]· [[경주 김씨]] 태자파 시조<ref>작금에 와서 [[부안 김씨]]· [[통천 김씨]]· [[경주 김씨]] 태자파에서 시조로 소원시키고, 1자 '김일'과 [[마의태자]]가 동일인이라 주장하며 서로 자신들의 시조라 한다. 그러나 사서(史書)에는 [[마의태자]]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하였으며, 《증보문헌비고》와 《조선씨족통보》도 별도 인물이라 기록하고 있다.</ref>
▲** 2자 : 김굉(金鍠, 金湟) - 김덕지(金德摯)와 동일 인물, 범공(梵空) - [[나주 김씨]] 비조<ref>역사에 시조 김운발은 [[경순왕]]의 손자라 전하는데, 일부 [[나주 김씨]]에서 시조 김운발의 아버지가 '김황'이라 한다.《김은열 묘지명》 원문에는 [[경순왕]] 2자 김굉(또는 김황)과 4자 김은열은 [[고려 태조]]의 외손으로, 고려 평장사를 지내고 나라에 공이 있는 신하여서 특별히 장지(葬地)도 하사(下賜)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서(史書) 및 《증보문헌비고》와 《조선씨족통보》에도 별도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ref><ref>계자(季子)란 막내아들을 의미하는데, [[죽방부인]] 소생이라는 제2자 김굉(또는 김황)과 제3자 김명(金鳴)[또는 김명종(金鳴鍾)의 서차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ref>
* 4자 : 김은열(金殷說, 고려 외손·공신·평장사·대안군(大安君) - [[경주 김씨|경주 김씨 은열공파]] 파조로 소원시킴<ref>일설에 [[경순왕]] 제3자라 한다.</ref>
▲** 3자 : 김명(金鳴, 金鳴鍾) - [[경주 김씨|경주 김씨 영분공파]] 파조<ref>[[경주 김씨]] 일문에서는 '김명종'의 시호가 '김영분'(金永芬)이며, [[경순왕]]과 [[죽방부인]] 사이의 셋째 왕자라며 [[경주 김씨]] 영분공파 시조로 모시고 있으나 이들은 사서(史書)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로, 《증보문헌비고》 및 《조선씨족통보》도 별도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ref>
▲** 5자 : 김중석(金重錫, 金錫) - [[의성 김씨]] 시조<ref>일설에 [[경순왕]] 제4자라 한다.</ref>
▲** 6자 : 김건(金鍵) - [[강릉 김씨]] 시조<ref>《증보문헌비고》 및 《조선씨족통보》에는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ref>
▲** 8자 : 김종(金鐘, 金錘) - [[삼척 김씨]]·[[선산 김씨|선산 김씨 김추계]] 시조<ref>《증보문헌비고》 및 《조선씨족통보》에는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ref>
▲** 2녀 : [[경주 이씨]] 이금서(李金書)에게 출가
▲** 3녀 : [[장수 황씨]] 황경(黃瓊)에게 출가
== 낙랑공주가 등장한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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