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립지리학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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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립지리학회의 역사 초기에는 ‘식민지’ 탐험, 특히 [[아프리카]], [[인도]] 대륙, [[북극]], [[중앙아시아]] 탐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찰스 다윈]], [[데이비드 리빙스턴]], [[헨리 모턴 스탠리]] 등 많은 탐험가, 여행가를 지원했다.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왕립지리학회가 지원한 탐사는 수시로 톱뉴스로 다루어졌으며, 학회의 회장과 협의회는 기자나 편집자들로부터 열렬한 취재를 받았다. 또한 학회의 초기 역사는 영국의 지리학계의 역사와 상호 연관되어 있었다. 정보, 지도, 차트, 지식 탐구를 통해 수집된 자료는 왕립지리학회에 보내져서 현재의 독특한 지리학 컬렉션을 형성하고 있다. [[1831년]]부터 [[1855년]]까지 학회에서는 대회와 기타 주제를 게재하는 〈학회논문집〉(''Society Proceedings'')을 발행했다. 이것은 [[1893년]]부터 현재까지 발간되고 있는 〈더 지오그래피컬 저널〉(''The Geographical Journal'')로 대체되었다. 학회는 영국 대학에서 교육, 연구 대상으로서의 지리학을 확립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옥스퍼드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 두 대학 지리학부 설립에 자금을 제공했다.
 
[[1879년]] 4월에 일본 최초의 지리학회인 도쿄지리학협회가 발족되었으며, 왕립지리학회는 그 모범이 되었다. 초대 회장으로는 기타시라가와 요시히사 친왕이 취임하여 황실이 후원자가 되어었다는되었다는 사실도 왕립지리학회의 모범을 따른 것이다.
 
지리학의 보다 체계적인 연구의 등장으로 1933년에 왕립지리학회 소속의 학술 회원으로 왕립 지리학회의 자매학회로 영국 지리학회(Institute of British Geographers, IBG)가 설립되었다. 당시 왕립지리학회는 귀족이나 군인이 회원의 대다수를 차지하였고, 〈더 지오그래피컬 저널〉도 연구의 장은 되지 못했다. 영국지리학회는 학술 대회, 현장 조사, 세미나, 전문 연구 그룹을 운영했고, 학회지 〈트랜잭션 오브 더 인스티튜트 오브 브리티쉬 지오그래퍼〉(''Transactions of the Institute of British Geographers'', 약칭 ''Transactions'')는 현재 주요 국제 저널로 다루어져 지리학 분야의 ‘랜드 마크’ 연구를 게재하고 있다. 처음에 〈트랜잭션즈〉는 학회 기사가 중심이었고, 발행도 1년에 한 권 뿐이었으며, 게재한 학술 논문은 통상 1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