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하"의 두 판 사이의 차이

1,870 바이트 제거됨 ,  2개월 전
윤문
태그: 동음이의 링크
(윤문)
| 웹사이트 = [http://www.yjh.or.kr 유재하음악장학회]
|나이=|항년 나이25세)}}
'''유재하'''(柳在夏, 1962년 6월 6일 ~ 1987년 11월 1일)는 대[[대한민국|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이다.
'''유재하'''(柳在夏, [[1962년]] [[6월 6일]] ~ [[1987년]] [[11월 1일]])는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이자 [[멀티플레이어 (음악)|멀티플레이어]]였다. 1962년 태어난 유재하는 [[한양대학교]] 작곡과에 재학하면서 1984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드]] 주자로 발탁되었다. 대학 졸업 이후에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로 활동, 1986년 김현식 3집의 〈가리워진 길〉이란 곡을 작곡하여 [[김현식]]의 초기 명반을 만들어 내는 데 일조했다. 이듬해 1987년에는 자신의 1집 앨범이자 마지막 앨범인 《사랑하기 때문에》를 발표하고, 같은 해 11월 1일 25세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02355&PAGE_CD=|제목=유재하 vs 유희열, 미래의 소리에 귀기울여라|성=|이름=|날짜=2008-05-19|뉴스=오마이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유재하'''(柳在夏, [[1962년]] [[6월 6일]] ~ [[1987년]] [[11월 1일]])는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이자 [[멀티플레이어 (음악)|멀티플레이어]]였다출생. 1962년 태어난 유재하는 [[한양대학교]] 작곡과에 재학하면서재학하던 중 1984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드]] 주자로 발탁되었다. 대학 졸업 이후에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로 활동, 1986년 김현식 3집의3집 수록곡 〈가리워진 길〉이란 곡을 작곡하여 [[김현식]]의 초기 명반을 만들어 내는 데 일조했다일조하였다. 이듬해 1987년에는1987년 자신의 1집 앨범이자 마지막 앨범인 《사랑하기 때문에》를 발표하고발표, 같은 해 11월 1일 25세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요절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02355&PAGE_CD=|제목=유재하 vs 유희열, 미래의 소리에 귀기울여라|성=|이름=|날짜=2008-05-19|뉴스=오마이뉴스|출판사=|확인날짜=}}</ref>
단 한 장의 앨범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어도 유재하의 음악은 당대는 물론 유재하가요제가 말해주듯 지금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국 대중음악의 위대한 유산으로 남았다.<ref>{{웹 인용|url=http://www.izm.co.kr/contentRead.asp?idx=21840&bigcateidx=19&subcateidx=41&view_tp=1|제목=만약 유재하가 살아있다면|성=임진모|이름=|날짜=2010년 10월|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70220093201/http://www.izm.co.kr/contentRead.asp?idx=21840&bigcateidx=19&subcateidx=41&view_tp=1|보존날짜=2017-02-20|url-status=dead}}</ref> 현재는 그를 기리는 유재하 음악 장학회가 설립되어 있으며, 재정적 문제로 열리지 못했던 2005년을 제외하고 1989년부터 매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를 개최하고 있다.<ref name="조이뉴스061101" />
 
단 한 장의 앨범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어도떠났음에도 유재하의그의 음악은 당대는 물론 유재하가요제가 말해주듯물론이고 지금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국 대중음악의 위대한 유산으로 남았다남게 되었다.<ref>{{웹 인용|url=http://www.izm.co.kr/contentRead.asp?idx=21840&bigcateidx=19&subcateidx=41&view_tp=1|제목=만약 유재하가 살아있다면|성=임진모|이름=|날짜=2010년 10월|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70220093201/http://www.izm.co.kr/contentRead.asp?idx=21840&bigcateidx=19&subcateidx=41&view_tp=1|보존날짜=2017-02-20|url-status=dead}}</ref> 현재는현재 그를 기리는 유재하 음악 장학회가 설립되어 있으며, 재정적 문제로 열리지 못했던 2005년을 제외하고 1989년부터 매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를 개최하고 있다.<ref name="조이뉴스061101" />
 
== 생애 ==
=== [[1962년]] ~ [[1984년]]: 어린 시절 ===
유재하는 [[1962년]] [[6월 6일]] [[경상북도]] [[안동군]] [[하회마을]]에서 사업가였던 부친 류일청과 모친 황영 사이에서 3남 4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유복했던 집안덕택에집안 그는덕택에 소위이른바 빽판과 전축으로 음악적 향유를 누릴 수 있었으며 전기 기타로 자신의 싹트는 창작열을 시험해 볼 수도 있었다.<ref name=":7">{{웹 인용|url=http://www.izm.co.kr/artistRead.asp?bigcateidx=&artistidx=205|제목=유재하|성=지운|이름=|날짜=2001-02|웹사이트=이즘|출판사=|확인날짜=}}</ref> 친형은 "내 바로 위에 형과 14살 차이가 나 둘이 친했다"며 "동생은 순진하고 어수룩한 구석이 있어서 몸이 아픈 내게도 잘 의지하는 귀염둥이였다. 사랑스럽고 늘 걱정스러웠다"고 말했다어린 유재하를 회고하였다.<ref name=":4">{{뉴스 인용|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2/02/0200000000AKR20170202195200005.HTML|제목=친형이 말하는 故유재하…"애주가에 음악 자존심 강했죠"|성=|이름=|날짜=2017-02-03|뉴스=연합뉴스|출판사=|확인날짜=}}</ref> [[1969년]] [[은석초등학교 (서울)|은석초등학교]]를 입학한입학할 그는무렵 이때아코디언과 [[아코디언]]과 [[첼로]]를첼로를 연주했고연주하였고,<ref name="조이뉴스061101">[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0100&g_serial=231345 요절한 류재하-김현식, 아직도 당신은!] 《조이뉴스》, [[2006년]] [[11월 1일]]</ref> 5학년 때부터는 기타를 붙잡고 노래를 했다. 또래여느 친구들은또래들과 딱지치기와 담을 타고 놀 때 유재하는달리 어니언스([[이수영]], [[임창제]])의 노래를 부르며 혼자 그렇게 놀았다. 특히 영화 배우 [[이소룡]]을 좋아했던 유재하는좋아하여 헤어스타일과 패션까지 이소룡을 따라 했고 매일 이소룡 흉내를 내며 다녔다고다녔다 한다.<ref name=":1">{{뉴스 인용|url=http://member.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subSectionId=1010090400&newsId=20160422000032|제목=[대중음악가 열전] 6. 뮤지션 유재하|성=최|이름=성철|날짜=2016-04-21|뉴스=부산일보|출판사=|확인날짜=}}</ref>
 
[[1975년]] [[삼선중학교]]에 입학했는데,입학하였다. 친형은 당시의 기타 솜씨를 보고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잘 치더라" 회상했다했다.<ref name=":4" /> 음악에 대한대해 남다른 애정을 쌓아가던 그는쌓아가며 프레시(Fresh)라는 그룹을 구상하기도 하였고, 끝내는 클래식으로 진로를 잡게 된다되었다.<ref name=":7" /> 그러나 음대를 가기로 작정하고장정하고 피아노 레슨을 받았던 [[대일고]] 재학 시절에도 클래식보다는 대중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유재하는많았다. 당시 레슨을 해주던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어도 숙제는 안 하고 혼자 곡 쓰고 노래만 하곤 했다.<ref name=":1" /> [[1981년]] 고교 졸업 후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에 진학하였다. 진학진학하여 후 [[정원영]], [[전태관]], [[김종진 (가수)|김종진]], [[박성식]], [[장기호]] 등과 교류하며 매일 모여 함께 음악을 듣고 연주하는 것이것을 일상이었다일상으로 알았다.<ref name=":1" /> 작곡뿐만 아니라 작사, 편곡 그리고 바이올린, 피아노, 기타, 키보드 등 여러 악기에 능통했던 그는 대학 졸업을 앞둔 [[1984년]], 그는 클래식과 재즈를 대중가요에 접목하는 음악적 지향점을 세웠다.<ref name=":0">{{뉴스 인용|url=http://weekly.hankooki.com/lpage/enter/200411/wk2004111013322537570.htm|제목=[추억의 LP 여행] 유재하|성=|이름=|날짜=|뉴스=데일리한국|출판사=|확인날짜=}}</ref>
 
=== [[1984년]] ~ [[1987년]]: 경력 ===
대학 재학 시절 2학년 때인 [[1982년]] [[위대한 탄생 (밴드)|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드 연주자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ref name=":7" /> 그를 만난 [[송홍섭]]은 "당시 대학생이었던 유재하는 내게는 굉장히 얌전한 학생이었고 성품도 깨끗하고 맑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팝 음악에 대한 욕망은 대단했다. 재하는 앞으로 팝 음악에 있어서 자기 깃발을 확실히 꽂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ref name=":6">{{웹 인용|url=http://music.naver.com/promotion/specialContent.nhn?articleId=3427|제목=유재하와 함께 했던 순간들|성=|이름=|날짜=|웹사이트=네이버 뮤직|출판사=|확인날짜=2017-02-05}}</ref> [[조용필]]은 훗날 유재하의 대표곡이 되는 〈사랑하기 때문에〉를 자신의 7집 앨범에 먼저 취입했다. 이 2개월의 짧은 여정은그러나 학교에서 대중음반 분야의 아르바이트는 허가할 수 없다는없다고 방해하여 연주자 생활은 사유의2개월만에 방해로접고 중단되었다말았다.<ref name=":7" /><ref name=":10">{{저널 인용|제목=사람은 갔어도 음악은 남아···|저널=1988년 음악세계 2월호|성=김|이름=정숙|url=|날짜=|출판사=}}</ref>
 
대학 졸업 후 군복무를 마친마치고 그는 [[1986년]]에 어릴 적 친구였던 김종진이 속해있던 [[김현식]]의 밴드인 [[봄여름가을겨울]]에서 객원 멤버로 활동하였다. 대학 선배 한봉근은 "콘서트때나 녹음 때 한두번 세션으로 도와줬을 뿐이지 정식 멤버는 아니었다" 말한다.<ref name=":8">{{뉴스 인용|url=http://entertain.naver.com/read?oid=021&aid=0000048806|제목=다시 듣고싶다…그들의 노래를|성=이승형|이름=|날짜=2003-10-28|뉴스=문화일보|출판사=|확인날짜=2017-02-04}}</ref> 이 그룹에서는 6개월쯤6개월 정도 활동하였으며 대구, 부산 등지에서 [[신촌 블루스]] 팀과 함께더불어 지방 공연을 갖기도 했다.<ref name=":10" /> 김현식에게는 자신의 1집에 수록될 전곡을곡을 주었다몽땅 주기도 했다.<ref name=":2">{{뉴스 인용|url=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1796594|제목=아! 故 유재하! 그가 없어 더욱 텅빈 오늘…11월 1일|성=이상훈|이름=|날짜=|뉴스=|출판사=|확인날짜=}}</ref> 하지만 밴드 멤버와 추구했던 음악적 지향점이 달랐고,<ref name=":0">{{뉴스 인용|url=http://weekly.hankooki.com/lpage/enter/200411/wk2004111013322537570.htm|제목=[추억의 LP 여행] 유재하|성=|이름=|날짜=|뉴스=데일리한국|출판사=|확인날짜=}}</ref> 후배 뮤지션을 편애하지 않고 챙겨주려 곡 하나만 가져간 김현식의 뜻을 오해하여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서운한 마음에 6개월의 밴드 활동을 접었다.<ref name=":2" />
 
이후에는 데뷔 음반을 발표하기 위해 언더 음악의 산실 동아기획을 찾아가 한양대 음대 선배로 기악과에서 클라리넷을 전공했던 포크 가수 이원재와 함께 데모 테이프를 제출, 김영 사장은 고민 끝에 상업적 성공이 불안했던 유재하의 음악을 탈락시켰다고 알려져 있다.<ref name=":0" /> 하지만, 김영은 이를 부인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잘못된 소문이다. 이원재는 이원재대로 따로 음반을 냈다. 원래 유재하는 김현식의 3집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의 세션 멤버로 내가 데리고 있었다. 그런데 집이 유복한 탓에 김현식 3집 녹음과는 별도로 자비를 털어 자신의 독집을 녹음한 것이다. ... 당연히 앨범 제작을 약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조원익이라는 베이스 치는 친구가 음반 제작업을 하려는데 도와달라며 유재하의 앨범을 넘겨달라 했다. 유재하도 좀 도와주면 어떻겠냐기에 흔쾌히 수락했다."<ref name=":12">{{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0131381|제목=김영 "최고 음악인은 김현식"|성=이창호|이름=|날짜=2005-11-18|뉴스=세계일보|출판사=|확인날짜=}}</ref>
 
{{quote box|align=left|width=25em|quote=86년 겨울, 재하가 레코드를 내겠다면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가 준비해 온 악보를 내미는데 거기에는 작사, 작곡뿐 아니라 편곡까지도 완벽하게 되어 있더군요. 다른 사람의 손이 갈 여지가 없었습니다. 일사천리로 레코딩이 진행되었죠. 참 재능있는 친구구나 하며 기대를 크게 걸었습니다.<ref name=":10" />|출처=―조원익|halign=center|bgcolor=#FFFFF0|quoted=true}}
 
이렇게 유재하는 [[1986년]] 겨울 베이시스트 조원익을 찾아가 자신의 프로젝트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였고제시,<ref name=":7" /> 1987년 8월 자신의 데뷔 앨범이자 유작 앨범이 된 《[[사랑하기 때문에]]》를 [[서울음반]]을 통해 발표한다. 음반이 나온 후 조원익은 유재하로부터 매니저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스스로 생각해봐도 매니저로서의 자질이 없었다고 여겼지만 서로 마음이 통하여 얼마 동안은 함께 일을 보러 다녔다. 이렇게 잠깐 매니저를 맡은 조원익은 그의 사후 처리 문제까지 맡았으며 결국에는 추모공연까지 기획하게 된다.<ref name=":10" />
 
《사랑하기 때문에》은 당초 '음정이 불안하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심의에서 반려가 되었으며, 발매 초기에도 평론가들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얻지 못했다.<ref>[http://ruliweb.daum.net/news/view/MD20071108105710051.daum 故 유재하 '사랑하기 때문에' 여주인공은 '플루트 김'] 《마이데일리》, [[2008년]] [[11월 8일]] 작성</ref> 클래식 음악의 화성학과 갖가지 악기들의 음색을 터득한 유재하는 기존의 대중 가요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노래를 만들었으며, 음악 관계자들조차도 '노래가 이상하다'라는 반응을 보였다.<ref>[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708231010521&code=900313 유재하, 한국 ‘대중음악의 自主’ 를 이루다.] 《경향신문》, 2007년 8월 23일 작성</ref> [[문화방송|MBC]] 방송 심의를 위해 PD들 앞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나 퇴짜를 맞았다. 거의 모든 노래가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정박자가 아닌 엇박자로 시작되는데 PD들은 이를 듣고 그를 박자도 못맞추는 가수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ref>{{뉴스 인용|url=http://entertain.naver.com/read?oid=021&aid=0000048806|제목=다시 듣고싶다…그들의 노래를|성=|이름=|날짜=|뉴스=|출판사=|확인날짜=}}</ref> [[한국방송공사|KBS]]의 《[[젊음의 행진]]》에서 한 번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부른 게 유재하의 유일한 TV 출연이었다.<ref name=":6" /> 게다가 일본의 야마다 가요제에 출품한 앨범의 수록곡 〈지난날〉은 예선에서 탈락, 그를 한층 더 낙담으로 몰아갔다.<ref name=":11">{{뉴스 인용|url=http://www.vop.co.kr/A00000089896.html|제목=생전의 불운, 사후의 영광|성=임진모|이름=|날짜=2007-10-30|뉴스=민중의소리|출판사=|확인날짜=}}</ref> 크게 상심한 유재하는 국내 음악 전문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조 섞인 상실감과 자괴감을 드러냈다. "제 노래 들어보셨어요? 우습죠?"<ref>{{웹 인용|url=http://www.mnet.com/special/5360|제목=[레전드 100人] 유재하, 대한민국 발라드의 기준이 되다.|성=소승근|이름=|날짜=|웹사이트=Mnet|출판사=|arxiv=|보존url=http://archive.is/KrxS6|보존날짜=2017-03-01|확인날짜=}}</ref> 이 무명의 시간은 여름이 되어 〈지난날〉이 전파를 타기 시작하면서 끝이 난다났다. 부담 없는 목소리는 순식간에 모든 불운의 상황을 반전시켰고, 음반은 호조를 띠기 시작했다.<ref name=":7" /> 유재하의 음반을 발매한 서울음반의 이재석은 유재하를말년의 '순한유재하 바람'이라고이렇게 회고하였다회고했다. "레코드가 나온 후 길에서 우연히 만나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자신의 작품에 대해 몹시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때는 《사랑하기 때문에》가 조금씩 인기를 얻기 시작할 무렵이었지만 그는 벌써 다음 앨범을 계획하며 다음에는 좀 더 나은 앨범을 만들어야겠다고 하더군요."<ref name=":10" />
 
=== 죽음 ===
[[1987년]] [[10월 31일]] 오후 5시 30분경 어둑해질 즈음이었다. "형 잠시 나갔다 올게. 가수 됐다고 동창이 찾아왔는데 빨리 해치우고 올게." 평소에도 다정다감했던 동생은유재하는 수술을 받고서 칩거하던 형의 볼에 뽀뽀하고 문밖을 나섰다.<ref name=":4" /> 이날 동창회에서 1집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던 그는 술에 취해 운전대를 잡은 친구 성낙헌의 차에 올랐다.<ref>{{뉴스 인용|url=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6103111005086147&outlink=1|제목=29년 전 오늘… '음악천재' 유재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다|성=이재윤|이름=|날짜=2016-11-01|뉴스=머니투데이|출판사=|확인날짜=}}</ref> 1987년 11월 1일 새벽 3시 27분경, 유재하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강변북로]] 부근에서 승용차를 타고 가다가 차가 중앙선을 침범하여 마주오던 한도콜택시와 정면 충돌하는 사고로 인해인하여 2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절명했다.<ref>휴지통 《동아일보》, 1988년 8월 3일</ref> 주검은 경기도 용인 천주교 용인 공원묘지에 묻혔다.<ref name=":4" /> 무덤 앞에는 노래 〈사랑하기 때문에〉의 악보 조각상이 있으나 그 악보 중 2개 음표가 틀려 있다.<ref name=":8" /><ref name=":5">{{웹 인용|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8040028910801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08-04&officeId=00028&pageNo=8&printNo=70&publishType=00010|제목="음주운전 교통사고 동승자도 50% 책임" "안전운행 주의 환기시킬 의무 지녀"|성=한겨레|이름=|날짜=1988-08-04|웹사이트=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출판사=한겨레|확인날짜=}}</ref> 그의 주검은 경기도 용인 천주교 용인 공원묘지에 묻혔다.<ref name=":4" /> 유재하 무덤 앞에는 노래 〈사랑하기 때문에〉의 악보 조각상이 있는데, 그 악보 중 2개 음표가 틀렸다.<ref name=":8" />
 
=== 사후 ===
《사랑하기 때문에》은 당초 '음정이 불안하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심의에서 반려가 되었으며, 발매 초기에도 평론가들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얻지 못했다.<ref>[http://ruliweb.daum.net/news/view/MD20071108105710051.daum 故 유재하 '사랑하기 때문에' 여주인공은 '플루트 김'] 《마이데일리》, [[2008년]] [[11월 8일]] 작성</ref> 클래식 음악의 화성학과 갖가지 악기들의 음색을 터득한 유재하는 기존의 대중 가요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노래를 만들었으며, 음악 관계자들조차도 '노래가 이상하다'라는 반응을 보였다.<ref>[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708231010521&code=900313 유재하, 한국 ‘대중음악의 自主’ 를 이루다.] 《경향신문》, 2007년 8월 23일 작성</ref> [[문화방송|MBC]] 방송 심의를 위해 PD들 앞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나 퇴짜를 맞았다. 거의 모든 노래가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정박자가 아닌 엇박자로 시작되는데 PD들은 이를 듣고 그를 박자도 못맞추는 가수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ref>{{뉴스 인용|url=http://entertain.naver.com/read?oid=021&aid=0000048806|제목=다시 듣고싶다…그들의 노래를|성=|이름=|날짜=|뉴스=|출판사=|확인날짜=}}</ref> [[한국방송공사|KBS]]의 《[[젊음의 행진]]》에서 한 번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부른 게 유재하의 유일한 TV 출연이었다.<ref name=":6" /> 게다가 일본의 야마다 가요제에 출품한 앨범의 수록곡 〈지난날〉은 예선에서 탈락, 그를 한층 더 낙담으로 몰아갔다.<ref name=":11">{{뉴스 인용|url=http://www.vop.co.kr/A00000089896.html|제목=생전의 불운, 사후의 영광|성=임진모|이름=|날짜=2007-10-30|뉴스=민중의소리|출판사=|확인날짜=}}</ref> 크게 상심한 유재하는 국내 음악 전문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조 섞인 상실감과 자괴감을 드러냈다. "제 노래 들어보셨어요? 우습죠?"<ref>{{웹 인용|url=http://www.mnet.com/special/5360|제목=[레전드 100人] 유재하, 대한민국 발라드의 기준이 되다.|성=소승근|이름=|날짜=|웹사이트=Mnet|출판사=|arxiv=|보존url=http://archive.is/KrxS6|보존날짜=2017-03-01|확인날짜=}}</ref> 이 무명의 시간은 여름이 되어 〈지난날〉이 전파를 타기 시작하면서 끝이 난다. 부담 없는 목소리는 순식간에 모든 불운의 상황을 반전시켰고, 음반은 호조를 띠기 시작했다.<ref name=":7" /> 유재하의 음반을 발매한 서울음반의 이재석은 유재하를 '순한 바람'이라고 회고하였다. "레코드가 나온 후 길에서 우연히 만나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자신의 작품에 대해 몹시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때는 《사랑하기 때문에》가 조금씩 인기를 얻기 시작할 무렵이었지만 그는 벌써 다음 앨범을 계획하며 다음에는 좀 더 나은 앨범을 만들어야겠다고 하더군요."<ref name=":10" />
유재하의 가족은 운전자 성낙헌의 아버지 선순용과 한도콜택시 등을 상대로 4억 1,600여 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였고, 1988년 8월 3일 서울민사지법 합의 15부에서는 "승용차를 모는 친구가 술에 취한 것을 알고도 같이 타고 가다 사고가 났으면 피해자도 50%의 과실이 있다"며 "피고 성씨는 유씨 가족에게 4,460여 만원을 지급하면 된다"고 판결했다.<ref name=":5" />
 
친형은친형이 그의밝힌 바로 미발표곡은 남아있지 않으며, "동생이 대략 5년간 11곡을 썼다"고 밝혔다한다.<ref name=":4" /> 사망 후사후 일반인들과 음악 전문가들 사이에 유재하에 대한 관심이 늘어남과 동시에함께 유재하의 음악은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다.<ref name=":3">{{웹 인용|url=http://www.izm.co.kr/contentRead.asp?idx=16365&bigcateidx=1&subcateidx=3&view_tp=1|제목=사랑하기 때문에|성=임진모|이름=|날짜=|웹사이트=이즘|출판사=|확인날짜=}}</ref> 3년 후 같은 날 김현식이 세상을 떠나자 연예계에는 "먼저 간 유재하가 술친구가 그리워 그를 데리고 갔다"는 호사가들의식의 이야기가 나돌았다. 여기에이에 더해 유독 11월에 연예계 사건 사고가 많이 터지면서 '11월 괴담설'로까지 부풀려졌다부풀려지기도 했다.<ref name=":13">{{웹 인용|url=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388739&cid=58276&categoryId=58283|제목=가요앨범 리뷰 - 사랑하기 때문에|성=최규성|이름=|날짜=|웹사이트=네이버|출판사=한국대중가요연구소|확인날짜=}}</ref> 유재하의 가족은 운전자 성낙헌의 아버지 선순용과 한도콜택시 등을 상대로 4억 1,600여 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였고, 1988년 8월 3일 서울민사지법 합의 15부에서는 "승용차를 모는 친구가 술에 취한 것을 알고도 같이 타고 가다 사고가 났으면 피해자도 50%의 과실이 있다"며 "피고 성씨는 유씨 가족에게 4,460여 만원을 지급하면 된다"고 판결했다.<ref name=":5" /> 2004년 7월 [[안병기]] 감독의 《[[분신사바]]》 영화 제작사는 인터넷에서 '다시 살려내고 싶은 연예인'이라는 설문 조사를 벌였고 유재하는 5위에 올랐다.<ref name=":0" />
=== [[1987년]] [[11월 1일]]: 죽음 ===
[[1987년]] [[10월 31일]] 오후 5시 30분경 어둑해질 즈음이었다. "형 잠시 나갔다 올게. 가수 됐다고 동창이 찾아왔는데 빨리 해치우고 올게." 평소에도 다정다감했던 동생은 수술을 받고서 칩거하던 형의 볼에 뽀뽀하고 문밖을 나섰다.<ref name=":4" /> 이날 동창회에서 1집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던 그는 술에 취해 운전대를 잡은 친구 성낙헌의 차에 올랐다.<ref>{{뉴스 인용|url=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6103111005086147&outlink=1|제목=29년 전 오늘… '음악천재' 유재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다|성=이재윤|이름=|날짜=2016-11-01|뉴스=머니투데이|출판사=|확인날짜=}}</ref> 1987년 11월 1일 새벽 3시 27분경, 유재하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강변북로]] 부근에서 승용차를 타고 가다가 차가 중앙선을 침범하여 마주오던 한도콜택시와 정면 충돌하는 사고로 인해 2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ref>휴지통 《동아일보》, 1988년 8월 3일</ref><ref name=":5">{{웹 인용|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8040028910801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08-04&officeId=00028&pageNo=8&printNo=70&publishType=00010|제목="음주운전 교통사고 동승자도 50% 책임" "안전운행 주의 환기시킬 의무 지녀"|성=한겨레|이름=|날짜=1988-08-04|웹사이트=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출판사=한겨레|확인날짜=}}</ref> 그의 주검은 경기도 용인 천주교 용인 공원묘지에 묻혔다.<ref name=":4" /> 유재하 무덤 앞에는 노래 〈사랑하기 때문에〉의 악보 조각상이 있는데, 그 악보 중 2개 음표가 틀렸다.<ref name=":8" />
 
2004년 7월 [[안병기]] 감독의 《[[분신사바]]》 영화 제작사는 인터넷에서 '다시 살려내고 싶은 연예인'이라는 설문 조사를 벌였고 유재하는 5위에 올랐다.<ref name=":0" />
친형은 그의 미발표곡은 남아있지 않으며, "동생이 대략 5년간 11곡을 썼다"고 밝혔다.<ref name=":4" /> 사망 후 일반인들과 음악 전문가들 사이에 유재하에 대한 관심이 늘어남과 동시에 유재하의 음악은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다.<ref name=":3">{{웹 인용|url=http://www.izm.co.kr/contentRead.asp?idx=16365&bigcateidx=1&subcateidx=3&view_tp=1|제목=사랑하기 때문에|성=임진모|이름=|날짜=|웹사이트=이즘|출판사=|확인날짜=}}</ref> 3년 후 같은 날 김현식이 세상을 떠나자 연예계에는 "먼저 간 유재하가 술친구가 그리워 그를 데리고 갔다"는 호사가들의 이야기가 나돌았다. 여기에 더해 유독 11월에 연예계 사건 사고가 많이 터지면서 '11월 괴담설'로까지 부풀려졌다.<ref name=":13">{{웹 인용|url=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388739&cid=58276&categoryId=58283|제목=가요앨범 리뷰 - 사랑하기 때문에|성=최규성|이름=|날짜=|웹사이트=네이버|출판사=한국대중가요연구소|확인날짜=}}</ref> 유재하의 가족은 운전자 성낙헌의 아버지 선순용과 한도콜택시 등을 상대로 4억 1,600여 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였고, 1988년 8월 3일 서울민사지법 합의 15부에서는 "승용차를 모는 친구가 술에 취한 것을 알고도 같이 타고 가다 사고가 났으면 피해자도 50%의 과실이 있다"며 "피고 성씨는 유씨 가족에게 4,460여 만원을 지급하면 된다"고 판결했다.<ref name=":5" /> 2004년 7월 [[안병기]] 감독의 《[[분신사바]]》 영화 제작사는 인터넷에서 '다시 살려내고 싶은 연예인'이라는 설문 조사를 벌였고 유재하는 5위에 올랐다.<ref name=":0" />
 
== 유산 ==
한양대 작곡과에서 정식으로 음악교육을 받은 유재하는 [[피아노]], [[바이올린]], [[기타]], [[첼로]] 등의 악기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708231010521&code=900313|제목=[커버스토리]유재하, 한국 ‘대중음악의 自主’ 를 이루다|성=|이름=|날짜=|뉴스=경향신문|출판사=|확인날짜=}}</ref> 봄여름가을겨울에서 유재하와 함께 활약하고 그의 추모 공연에서도 피아노를 연주한 [[박성식]]은 유재하의 연주를 이렇게 평가했다. "연주자로서의 유재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연주 스타일은 감정이 잘 살아 있어 듣는 사람에게 크게 어필한다는 게 특징이었죠.<ref name=":10" />{{quote box|align=right|width=30em|quote=재하의 천재성에 중요한 요소는 오케스트레이션이었다. 오케스트라의 화법이 분명 달랐다. 음악을 언어라고 하면 단어의 구사가 달랐고 그 언어는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재하의 오케스트라는 [[냇 킹 콜]], [[웨스 몽고메리]], 그리고 70년대 오케스트라를 연구했던 것이었는데 당시 우리는 그런 것들이 먼 이야기였는데 재하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ref name=":6" />|출처=―[[김종진 (가수)|김종진]]|bgcolor=#FFFFF0|quoted=true}}
 
[[임진모]]는 "피아노는 말할 것도 없고, 바이올린 첼로 기타를 마스터했으며 작사 작곡 솜씨도 뛰어났다. 악기에 능통한 덕분이었지만 편곡까지 도맡았다는 점은 당시 상황으로서는 놀라운 것이었다."고 말했다했다.<ref name=":3" /> 음악웹진 이즘 필자 조이슬은 "그가 드럼, 기타, 건반을 모두 소화해낸 멀티 플레이어라는 사실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바로, 악기 하나하나의 음색까지 정확히 파악하여 곡 전체를 조율하고, 곡의 질감을 결정하는 비범한 '편곡' 능력이었다. 우리가 지금에서도 '고급가요'라고 부르는 정통 발라드의 얼개를 사실상 이 때 형성한 것이다."라고 말한다.<ref>{{뉴스 인용|url=http://www.vop.co.kr/A00000089946.html|제목=사랑하기 때문에, 유재하가 남긴 발자취|성=조이슬|이름=|날짜=2007-10-30|뉴스=민중의소리|출판사=|확인날짜=}}</ref> 그를 평생의 스승으로 삼고 있는 [[신승훈]]은 "작사, 작곡, 편곡이 모두 유재하로 표기되어있는 것을 보고 일대 충격을 받았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vop.co.kr/A00000089944.html|제목=변색되지 않는 아름다움, 유재하의 음악|성=배순탁|이름=|날짜=2007-10-30|뉴스=민중의소리|출판사=|확인날짜=}}</ref> [[김수철 (가수)|김수철]]은 당시 유재하의 앨범을 듣고 "노랫말이 너무 빼어났다"는 느낌이 앞섰다고 술회한다.<ref>{{웹 인용|url=http://music.naver.com/promotion/specialContent.nhn?articleId=4559&isIng=ALL&page=4|제목=한국 대중음악계의 찬란한 보석|성=|이름=|날짜=|웹사이트=네이버 뮤직|출판사=|확인날짜=}}</ref>
 
작곡과 학생들에게는 한 학기에 한 번씩 직접 작곡한 작품을 제출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다. 대학 2학년 쯤 되었을 때의 유재하가 작곡한 악보를 본 교수는 그것을 집어던지며 '자네가 아무리 바빠도 모차르트를 배껴오면 어떡하는가'라고 그를 질책했다. 그것은 유재하의 작곡이 화성이나 악절진행에서 모차르트와 비슷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 그만큼 훌륭한 뜻으로도 풀이될 수 있다.<ref name=":10" /> 삼선 중학교 시절 그는 브레드, 퀸, 비틀즈, 피터 프램프톤의 음악을 많이 들었다고 전해진다.<ref name=":7" /> 김종진은 그가 "라이오넬 리치, 필 콜린스, 엘튼 존의 노래를 즐겨 불렀고 종종 다른 가수들에게 줬던 본인의 노래들도 부르며 놀곤 했다."고 말했다.<ref name=":6" />
유재하는 애주가였다. 바로 위의 친형은 "선친이 약주를 좋아하셨는데 집안 내력인지 제가 동생에게 '술을 366일 먹느냐'고 잔소리를 하곤 했죠. 재하는 싸고 독한 40도짜리 쥬니버 드라이진을 좋아했어요. 전 한잔도 못 하겠던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1시간 반이면 700ml짜리 한 병을 다 비웠죠. 그것도 '스트레이트'로요."라고 회고하였다.<ref name=":4" /> 김광민 또한 "유재하는 술을 굉장히 좋아했다. 술 마시다가 돈이 떨어지면 집에서 돈을 가져와 더 마실 정도였다"고 말했다.<ref name=":9">{{뉴스 인용|url=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0622816|제목='라스' 김광민 부유했던 유재하 언급 '집안 집기 다 외제품'|성=|이름=|날짜=2014-10-30|뉴스=일간스포츠|출판사=|확인날짜=}}</ref>
 
장기호는 "아버님이 탄광을 하신 것으로 안다. 재하의 외모는 중산층 아래쪽 이미지인데 집을 가보면 굉장히 부유했다"며 "약간 빈티지다. 재하 집에 있던 모든 집기는 외제품이였다."라고 당시 부유했던 유재하의 집안을 회상했다.<ref name=":9" /> 동아기획의 대표 김영은 유재하가 "요즘말로 하면 개그맨"이었으며 "또 미남은 아니었지만 바람둥이였다."고 말했다.<ref name=":12">{{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0131381|제목=김영 "최고 음악인은 김현식"|성=이창호|이름=|날짜=2005-11-18|뉴스=세계일보|출판사=|확인날짜=}}</ref> 김종진은 "재하는 무대 위에서 '꺅' '오빠' 소리 듣는 걸 좋아했던 친구였다"고 기억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yonhapnews.co.kr/entertainment/2013/10/31/1101000000AKR20131031052300005.HTML|제목=KBS 쿨FM, 故 유재하 라디오 출연 육성 공개|성=|이름=|날짜=2013-10-31|뉴스=연합뉴스|출판사=|확인날짜=}}</ref>
 
== 음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