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네타카 친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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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초 4년 4월 1일 대외기(大外記) 나카하라노 아손(中原朝臣) 모로카네(師兼)<ref>오시코지 모로카네(押小路師兼).</ref> 가 명을 받든다.</small>
 
친왕은 고사가 천황의 사실상의 장자<ref>무네타카 친왕에게는 엔조 법친왕(円助法親王)이라는 형이 있었으나, 구니히토왕(邦仁王) 즉 훗날의 고사가 천황이 불우한 경위로 정식 [[원복]]을 행하지 못한 상태에서 태어난 아이로 장차 승려로 출가해야만 하는 운명이었다.</ref> 였고 아버지로부터 총애받았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낮았기 때문에 황위를 이어받을 가능성이 희박했고, 고사가 천황은 이러한 친왕의 장래를 몹시 염려했다. 그런 한편으로 쇼군케(將軍家)와 셋칸케(攝關家) 양쪽을 지배하던 구조 미치이에(九條道家, 요리쓰구의 할아버지)에 의한 막부 정치의 개입에 위기감을 갖고 있던 [[싯켄]](執権) [[호조 도키요리]](北條時賴)도 구조 집안을 정계에서 배제하고자 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천황과 도키요리의 생각은 일치했고, '미야 쇼군(宮將軍)' 즉 황족 쇼군이 탄생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미 호조 씨(北条氏)에 의한 전제 체제가 정비된 막부에서 쇼군은 아무런 권한도 갖지 못했고, 따라서 쇼군은 와카(和歌) 창작에 몰두하게 되어 와카 모임에 빈번하게 참석하였다. 결과 가마쿠라에서 무가(武家) 중심의 가단(歌壇)이 융성하게 되었고, 고토 모토마사(後藤基政), 시마즈 다다카게(島津忠景) 등 고케닌(御家人) 출신의 유능한 가인(歌人)들이 대거 배출되었다. 가마쿠라 가단은 《속고금화가집(續古今和歌集)》의 찬자를 뽑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고, 친왕 자신도 이 와카집에 가장 많이 입선된 가인이 되었다. 대표적인 와카집으로 《유엽화가집(柳葉和歌集)》, 《경옥화가집(瓊玉和歌集)》, 《초심우초(初心愚草)》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