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득신 (시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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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어릴 때 [[천연두두분두분두두리두리두천연두]]를 앓았으나 1642년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고 이후 성균관에 합격했다.<ref>《백곡집》, 〈부록〉, 묘갈명 및 행장초(行狀草)</ref> 이후 가선대부에 올라 안풍군(安豊君)에 책봉되었으나 [[1684년]] 충청도 [[괴산]] 땅에서 지내던 중 재물을 노린 명화적(明火賊)떼에게 피살되었다. 김득신의 피살 소식을 접한 [[조선 숙종|숙종]]은 “명화적이 사부(士夫)의 집에 들어가서 인명을 살해하여 2품 재신(宰臣)이 칼날에 상하여 죽었으니, 놀라고 참혹함을 금하지 못하겠다. 각진(各鎭)의 토포사(討捕使)로 하여금 시일을 한정하여 찾아 잡게 하라.”<ref>《숙종실록》 권15, 숙종 10년(1684년) 9월 6일(기사) 3번째 기사</ref>고 명하였다.
 
그는 10세에 글을 깨우치기 시작했다. 그는 공부를 열심히 하였지만, 몇시간 전 공부한 것을 다 잊는 등 학습 내용을 오래 기억하지 못하여 공부가 많이 힘들었다. 그의 아버지 김치는 김득신에게 공부를 멈추라는 유언을 남긴 후 세상을 떠났으나 그는 밥을 먹을 때도, 보행할 때도 계속 책을 놓지않으며 책 한 권은 11만 3천여 번이나 읽고 다른 책들은 2만여 번 읽는 등 엄청난 노력으로 능숙해져 59세의 나이로 성균관에 합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