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어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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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아프리카]]에서 세력을 넓히던 [[영국]]과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이것이 [[1차 보어 전쟁]]과 [[2차 보어 전쟁]]이다. 전쟁의 발달은 5년 이상 거주한 영국 이주민에게도 투표권을 달라는 요구를 구실로 한 것이었다. 보어 전쟁 당시 보어인들은 사실상 농부들에 불과했지만 [[민병대]]를 구성하여 [[영국군]]에 대항했다. 5만4천여 명밖에 안되는 소수였지만 맥심 기관총, 대포, 최신 모제르 총등으로 무장했으며 적의 손이나 발을 맞출 정도로 뛰어난 [[사격]]솜씨를 갖추었다고 한다. [[1900년]] 스피온 콥에서의 전투는 보어인이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은 영국군과 영국에게는 큰 충격이였다.
 
[[1899년]]에 작은 국경도시 마페킹(Mafeking, Mafikeng)에서 217일 동안 [[영국군]]은 보어인들에 대한 포위공격을 방어하는데방어하는 데 성공하고 [[1900년]]에는 오렌지 자유국의 수도 블룸폰테인과 트란스발의 수도 [[프리토리아]]를 점령하였다. 이후 보어인들은 [[게릴라]]식 전략으로 전환하여 저항을 시도했다. 하지만 영국군은 게릴라를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흑인]]들과 보어인들의 거주지 3만여 가구를 소각하여 활동근거를 말살하고, 여자와 어린이 보어인들을 [[강제수용소]]에 몰아넣었다. 이는 야만적 [[학살]]을 낳은 최초의 강제수용소였으며 훗날 [[나치]]의 [[강제수용소]]의 본보기가 되었다. 모두 2만 7,927명의 비전투원 어린이와 여성이 이 수용소에서 죽었다. 어린이들과 여성들을 수용소에 죽게 한 영국군의 잘못은 고의적인 대량[[학살]]이라기보다는 영국군의 무능력과 무감각의 산물이였다. 결국 [[보어 전쟁]]은 보어인들의 패배로 끝났다. [[1902년]] [[5월 31일]] [[베레니깅 조약]]에서 트렌스발과 오렌지 자유국은 독립을 상실하고 영국의 [[식민지]]로 병합되었으며 [[1910년]]에 [[남아프리카 연방]]이 수립되었다.
 
== 에밀리 홉하우스의 반전운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