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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울주([[허베이성]] 울현)의 출신으로 열심히 공부를 하였으나 과거에 여러차례 낙방한후 현청의 교관(敎官) 생활을 하였다. 교관 생활중에 죄를 지어 귀양살이를 가게 되었는데, 그때 마침 황궁에서 환관을 모집하러 내려왔다. 귀양 가서 고생하기 싫었기에 자진해서 거세를 하고 환관이 되었다.<ref name=":0">[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55768&cid=62060&categoryId=62060 <nowiki>[네이버 지식백과] 토목의 변 [土木之變] (중국상하오천년사, 2008. 4. 25., 풍국초, 이원길)</nowiki>]</ref> 당시 황궁내에 있던 내시양성 기관인 내서당의 환관들 중에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몇명 없었다. 과거 태조 주원장의 재위기에 실행한 '환관 억제책'의 일환으로 환관의 정치 간여금지와 더불어 환관들에게는 글을 가르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ref>박영규 <환관과 궁녀> 김영사 2004 p137</ref> 조카의 제위를 쿠데타([[정난의 변]])를 통해 찬탈한 제3대 [[영락제]]에 의해 환관 정치가 부활하였으나<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833022&cid=62059&categoryId=62059 <nowiki>[네이버 지식백과] 환관의 정치 개입 - 황제의 옆에 선 환관, 위세를 부리다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 3. 23., 안정애)</nowiki>]....한나라와 당나라가 환관의 횡포로 말미암아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게 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명 태조는 이러한 과거 역사 경험을 거울삼아 환관들을 제어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중략)..이는 건문제 때도 계속되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자가 '정난의 변' 때 영락제와 내통하여 영락제의 황제 즉위에 공을 세우기도 했다. 영락제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환관에 대한 대우를 개선시켰다. 남경을 떠나 북경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궁전을 넓히고 환관의 숫자를 수천 명으로 늘인 데 이어 위계질서에 따른 환관의 직책을 만들었다. 그중 최고위직이 사례감이었다. 공식문서에 황제 대신 대필하는 병필태감도 사례감에서 나왔다. 나중에는 궁중뿐만 아니라 지방장관 아래에 감찰관으로 파견되기도 했으며 정보를 수집하는 밀정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영락제의 밀실정치에는 관료보다 환관의 활용도가 컸다.</ref><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55768&cid=62060&categoryId=62060 <nowiki>[네이버 지식백과] 토목의 변 [土木之變] (중국상하오천년사, 2008. 4. 25., 풍국초, 이원길)</nowiki>]...조카한테서 황제 자리를 빼앗은 성조는 대신들이 복종하지 않을까 봐 곁에 있는 환관들을 특별히 신임했고 그 때문에 환관의 세력이 점차 커졌다. 선종(宣宗) 대에 이르러서는 황제가 비답(批答)을 내려야 하는 상주서마저 환관들이 대필하게 되었으니 그 권세가 얼마나 높았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ref> 문신들은 환관을 멸시하며 그들에게 글을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왕진은 환관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환관들은 그를 왕 선생이라고 불렀다.
 
왕진은 학식이 제법 있었던 터라 [[선덕제]]의 명으로 태자 주기진(朱祁鎭)에게 글을 가르치며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어린 태자는 공부를 싫어하고 놀기를 좋아했는데 왕진은 명색이 선생이라는 자가 가르치라는 글은 안 가르치고 이런저런 방법을 내어 태자의 비위만 맞춰주었다.<ref name=":0">[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55768&cid=62060&categoryId=62060 <nowiki>[네이버 지식백과] 토목의 변 [土木之變] (중국상하오천년사, 2008. 4. 25., 풍국초, 이원길)</nowiki>]</ref> 1435년 [[정통제|정통제가]] 9살의 어린나이에 즉위한후에 사례감의 장인 장앙태감이 되었고, 황제의 문서를 대필하며 이를 조작하는등의 전횡을 일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