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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조의 시조 [[석륵]]은 원래 유연의 휘하에서 활약한 장수였다. [[312년]]에 [[석륵]]은 양국(襄國 : [[허베이성]] 형태)을 중심으로 하북 일대에 반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였으며, [[319년]]에는 조왕(趙王)에 즉위하여 완전히 독립하여 국가를 건국하였다. 후조와 전조는 화북을 양분하여 서로 대립하였으며, 후조는 주로 낙양 동쪽 지역을 장악하였다. [[325년]]에 전조의 군대를 격파하여 낙양 동쪽 지역에서의 패권을 확보하였으며, 그 결과 [[동진]](東晉)으로부터 회하(淮河) 이북의 영토를 대부분 빼앗아 장악하였다. [[328년]]에는 낙양에서 전조의 군대를 격파하고 전조의 황제 유요를 포로로 잡았으며, [[329년]]에는 [[석호 (후조)|석호]](石虎)를 파견하여 전조를 멸망시켰다. 이후 유요와 유요의 후예들을 예우하였다.
 
[[330년]] 2월, 흉노족 [[석륵]]은 북방 이민족의 황제 명칭인 천왕(天王)에 즉위하였으며 9월에는 황제에 즉위하였다. [[333년]], [[석륵]]이 죽자 중산왕(中山王) [[석호 (후조)|석호]](石虎)가 권력을 잡고 태자 [[석홍]](石弘)을 즉위시켰다. 석홍의 전횡에 반발하여 장안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석호는 [[334년]]에 석홍을 폐위시키고 거섭조천왕(居攝趙天王)을 자처하며 후조를 섭정하여 다스렸다. 석호는 수도를 업(鄴)으로 옮기고 불교를 진흥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으나, 무리한 토목 공사와 대외 원정을 실시하여 국력을 크게 소모시켰다. [[338년]]에는 단부(段部)를 멸망시키고, [[339년]]에는 동진을 공격하여 장강 이북 지역을 정복하여 다수의 한족들을 포로로 끌고 오는 등 세력을 크게 확대하였다. [[340년]], [[342년]]에는 대규모 동진 원정을 계획하여 가혹한 징병과 징발을 하여 동진을 유린하여 멸망 직전까지 몰았으나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하였다. [[346년]]에는 [[전량]](前凉)을 공격하였으나 역시 패배하였다.
 
[[348년]]에 후계자 문제로 인해 숙청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서쪽으로 유배되었던 10만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곧 진압되었으나 후계자 문제와 반란으로 인해 석호는 크게 쇠약해졌으며, [[349년]]에 황제에 즉위한 석호는 곧 사망하였다. 석호가 죽자 11세의 어린 [[석세]](石世)가 황제에 즉위하였으나 곧 반정이 일어나 [[석준]](石遵)이 즉위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혼란으로 인해 동진군이 공격해 오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또한 쿠데타 과정에서 석호의 양자 [[염민|석민]](石閔)이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으며, 이를 숙청하려던 석준은 석민의 공격을 받고 폐위·살해되었다. 석민은 [[석감]](石鑒)을 황제에 옹립하고 후조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350년]], 석민은 석감을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염위]](冉魏)를 건국하였다. 양국에서 [[석지]](石祗)가 일시적으로 후조를 부활시켰으나 [[351년]]에 부하의 반란으로 살해되어 후조는 멸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