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일본부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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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대일배상요구와 영토 환수의 노력 (1948~1949) 참고를 생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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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판 ==
* 《[[일본서기]]》는 8세기 초에 쓰여진 책으로써 그 내용이 의심스럽고 상호 모순되는 부분이 많아 지금은 일본의 학자들도 비판을 하는 학자가 상당히 많다. 임나일본부설과 관련된 [[일본서기]]의 대표적인 왜곡으로 [[백제]]의 장군 목라근자(木羅斤資)에 대한 [[일본서기]]의 서술이 있다. [[일본서기]] 382년 기록<ref>[http://www.seisaku.bz/nihonshoki/shoki_09.html 일본서기] "百濟記云、壬午年、新羅不奉貴國。貴國遣沙至比跪令討之。新羅人莊飾美女二人、迎誘於津。沙至比跪、受其美女、反伐加羅國。加羅國王己本旱岐・及兒百久至・阿首至・國沙利・伊羅麻酒・爾汶至等、將其人民、來奔百濟。百濟厚遇之。加羅國王妹既殿至、向大倭啓云「天皇遣沙至比跪、以討新羅。而納新羅美女、捨而不討、反滅我國。兄弟人民、皆爲流沈、不任憂思。故、以來啓。」天皇大怒、卽遣木羅斤資、領兵衆來集加羅、復其社稷。一云、沙至比跪、知天皇怒、不敢公還、乃自竄伏。其妹有幸於皇宮者、比跪密遣使人問天皇怒解不、妹乃託夢言「今夜夢見沙至比跪。」天皇大怒云「比跪何敢來。」妹、以皇言報之。比跪、知不兔、入石穴而死也。"</ref>을 보면 전쟁에서 [[대가야]]를 구원한 사람은 백제 장군인 목라근자로 되어 있다. 그러나 목라근자의 가야제국(諸國) 평정과 대가야 구원을 마치 천왕의 명에 따라 일본에 파견하여 이루어진 것처럼 왜곡되고 있다. 백제는 내륙국이였던 [[대가야]]를 바로 구원할 수 있었지만, 일본은 내륙에 있는 [[대가야]]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바다를 건너 [[한반도]] 남쪽 지역들을 뛰어넘어야 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ref>{{서적 인용 | 저자 = 김현구 |제목=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출판사=창작과비평사 |연도=2002 |쪽=56~60 |ISBN=9788936482251 }}</ref> 이 기록을 근거로 일본의 학자들은 일본이 가야를 200년 가까이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었다.
* '일본' 이라는 국호는 [[고구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한 7세기 이후에 사용된 것이니 만큼, 4세기에 '일본' 이라는 명칭이 들어가는 '임나일본부' 가 있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ref>{{서적 인용 | 저자 = 김현구 |제목=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출판사=창작과비평사 |연도=2002 |쪽=70~73 |ISBN=9788936482251 |인용문 = '일본(日本)'이라는 명칭은 7세기에 생겨난 말로 '일본현읍'이라는 표현이 보이는 509년에는 '일본현읍' 중의 '일본'이라는 표현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다. }}</ref>
* [[임나일본부]]는 중요한 역사 기록 일텐데 [[고사기]]에는 전혀 기록이 되어 있지않다. [[720년]] 편찬된 [[일본서기]]보다 8년 전 편찬된 [[고사기]]에는 [[신공왕후]]의 임나정벌과 같은 사실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ref>임라일본부 연구</ref>
*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데 한국의 기록에 이를 입증할 만한 단서가 전혀 없다. 단지 '임나' 라는 지명만이 [[광개토왕릉비]], [[삼국사기]], [[진경대사탑비]]에 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