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포레토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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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0월 24일]] 새벽 2시에 이루어진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의 공새는 새벽의 안개가 더욱 동맹국측에 더 유리하게 만들어 완전한 동맹군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최초의 공세는 동맹국측의 중포를 동원한 엄청난 포격과 [[독가스]], [[연막탄]]에 독일, 오스트리아군의 효율적인 통합작전으로 순식간에 이탈리아 제2군의 참호선을 무력화 시키게 된다. 첫날에만 약 25km의 진격이라는 놀라운 전과를 올리는데 이는 특수부대의 잠입작전을 이용해 [[수류탄]]과 [[화염방사기]]를 이용한 새로운 전술의 등장으로 이탈리아군을 더욱 힘들 게 만들 게 된다.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의 두 번째 공격에서는 이탈리아군의 강한 저항에 부딛쳐 첫 번째 공세보다는 적은 전진을 하게되는데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지역에서의 계속된 성공으로인해 이미 이탈리아군은 더 이상 카포레토 전선을 지킬 만한 힘이 없게 된다. 다시 한 번 이탈리아군은 붕괴되기 시작하고 카펠로는 그의 이탈리아군에게 후퇴를 명령한다. 아직 이탈리아군의 주력 지원군이 도착하려면 4일이나 남았기 때문에 이탈리아군은 [[10월 30일]]까지 거의 1주일간에 걸쳐 후퇴를 계속하게된다계속하게 된다.
 
하지만 초반의 엄청난 피해에 겁을 먹은 이탈리아군 최고 사령부에서는 독일의 또 다른 공세가 시작되기 전에 계속 그 지역의 전군에 대해 후퇴를 명령하게 되고 아직 완벽한 보급라인이 구축되지 않은 동맹국측으로서는 거의 피해없이 진격을 계속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11월 10일]]까지 후퇴를 계속해 [[베니스]]로부터 겨우 30km떨어진 [[피아베 강|피아베(Piave)강]]까지 후퇴해 그곳에서 전열을 가다듬게 된다. 오히려 이탈리아군의 너무 빠른 후퇴로 인해 전진속도를 맞추기가 어려울정도였다어려울 정도였다.
 
이 전투에서의 대규모 후퇴로 인해 이탈리아군은 20만명여의 피해를 입게되는데입게 되는데 이중 90%가 포로였다. 또한 많은 수의 포를 잃었고 연합국측에서는 상당히 놀라게 된다. 따라서 이탈리아군 최고사령과이자 수상이었던 까또르나는 해임되고 [[아르만도 디아츠]](Armando Diaz)장군이 새로운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된다. 또한 수상에는 [[비또리오 올랜도]](Vittorio Orlando)가 임명된다. 전쟁장관에는 보셀리(Boselli)가 임명되어 연합국측으로부터 즉각적이고 강화된 지원을 약속받게 된다.
 
카포레토 전투 전까지 이탈리아군은 단독으로 오스트리아군과 전투를 벌여왔으나 독일군의 투입과 카포레토 전투의 대 재앙으로 인해 이 정책을 포기하게된다포기하게 된다. 따라서 연합국은 프랑스군 6개사단과 영국군 5개사단을 비롯하여 많은 수의 양국 비행편대와 보급지원 부대들을 이탈리아에 배치하게 된다.
 
이탈리아 국내에서도 많은 충격을 받게 되고 결국 이탈리아는 전력의 상당수를 프랑스와 영국에 의존하게 되는 상황을 인정하게 된다. 한편 오스트리아군은 11월 12일 트렌티노에서 다시 공세를 시작하지만 이번에는 이탈리아군의 강한 저항과 병력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공세는 12월까지 계속되지만 영국,프랑스군의 지원과 이탈리아군의 재정비로 인해 실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