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라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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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오이라트는 [[홉스굴]] 지역에서 일어났다. 홉스굴은 호수의 최대 길이가 134킬로미터나 되는 몽골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이며, 지금은 몽골에서 최고의 관광지 가운데 한군데이다.
 
몽골 서북쪽에서 일어난 오이라트를 흔히 할하 몽골인 또는 동몽골과 구분하여 서몽골이라 한다. 동몽골 지역이 초원 지대라면, 서북 몽골은 주로 초원삼림지대라고 할 수가 있는 데있는데, 오이라트라는 부족 이름에서도 지역의 특성을 알 수가 있다. 오이라트는 "숲의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오이라트부의 지도자는 칸이라는 직위대신 太師(타이시)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타이시라는 칭호는 몽골제국 시대 군사령관이라는 의미였다. 오이라트부 지도자가 실권을 장악하였음에도 칸의 지위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오이라트부는 칭키스칸의 직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설령 이들이 칸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고 하드라도, 몽골의 유목민들이 그를 칸으로 인정해주지 않았는데, 이를 칭키스칸의 통치원리(chinggisid principle)라고 하였다.
 
1416년 마흐무드가 죽고 그 아들 토곤이 마흐무드의 지위를 이어받는 데이어받는데, 토곤 시대에 오이라트는 몽골 초원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아울러 토곤의 아들이 [[에센 칸|에센]]인데, 이 부자시대에 오이라트는 몽골초원의 패자가 되었다.
 
1406년 영락제는 몽골 부족들에게 조공무역을 허락하였는데, 마시(馬市)라는 형태로 교역을 하여 영종까지 관례화되었다. 명나라는 이들로부터 말과 가축 등 그 부산물을 수입하고, 비단 등의 의류와 식량 등을 수출하였다. 처음에는 50명 정도의 사절단 규모가 [[에센 칸|에센]] 때에 이르러 3,000명까지 늘어났고, 주변 위구르의 상인들까지 가세하여 무역량이 늘어나고 밀무역도 성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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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센이 몽골초원을 지배하고 있을 때, 명목상의 칸은 케룰렌 강에 본거지를 둔 타이슨 칸이었다. 에센은 누이동생을 타이슨 칸의 정부인으로 들여 그 사이에서 낳은 자식을 칸으로 옹립하려고 하였으나, 타이슨 칸이 여기에 반발을 하면서, 에센을 공격하나 실패하여 살해되었다.
 
1452년 [[타이슨 칸]] 살해 후 에센은 동몽골 황족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에 들어가게 되는 데되는데, 황족 중 어머니가 오이라트 출신이 아닌 경우에는 모두 죽여 버렸다. 에센은 사람만 죽인 것이 아니라, 동몽골이 가지고 있던 거의 모든 것 심지어는 기록과 문서 그리고 족보 등도 거의 모두 소실되어 버렸다.
 
이듬해 에센은 스스로 대칸 위에 오르게 되는 데되는데, 칭키스칸 가계가 아닌 오이라트 계통의 칸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에센 역시 오래가지 못하고 부하에게 살해가 되었다.
 
에센의 피살과 함께 오이라트 부도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하여 오이라트는 몽골의 서쪽으로 물러났다. 이후, 오이라트는 서쪽에서 새롭게 세력을 형성함으로써 나중에 몽골 고원을 다시 장악하게 되는 [[준가르]] 제국의 등장을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