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데나르데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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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뉴는 [[두비슬라브 그네오마르 본 나즈멜]](Dubislav Gneomar von Natzmer) 휘하의 프로이센 기병대에 대한 공격을 명하였다. 비록 격전이 일어났지만, 이 공격은 분산되었다. 그리고 방돔은 모호한 결정을 내렸다. 그는 개인적으로 12개 여단을 이끌고 공격을 개시하여 단병접전을 개시하였다. 이는 부르고뉴 공작이 그의 사령부에서 전장을 보지 않고 있었던 반면에 다른 사령관인 방돔은 통솔권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개인적으로 싸우고 있었음을 의미했다.
 
많은 역사가들은 동맹군의 약한 우익이 프랑스군 좌익의 공격에 의해 거의 붕괴했음에 동의한다. 방돔은 이를 깨닫고 부르고뉴에게 좌익과 함께 공격을 할 것을 허가해주길 원했다. 부르고뉴 공작은 부정적인 대답을 보내왔다. 그러나 이 연락은 전달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상황은 고전하고 있는 그의 군대에 대해 지원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던 방돔에게 더욱 악화되고 말았다. 그의 군대는 길게 늘려졌고, 동맹군의 좌익에게 포위당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아가일 부대가 접근했을 때 그들은 동맹군의 전열을 길게 분산시켜 놓았으나, 이는 위험으로부터 프랑스군을 지키는데지키는 데 충분히 빠른 조치가 아니었다.
 
==동맹군 측면 작전행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