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첸 전투 (1632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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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6시, 파펜하임군의 후속보병 약 3,000 ~ 4,000명이 전장에 도착했다. 이미 날은 저물어 적우방의 식별이 곤란했기 때문에 발렌슈타인은 그들을 전투에 참가시키지 않았다. 이때쯤 같은 이유로 개신교 군도 공격을 중지했다. 다음날 17일 이른아침 발렌슈타인은 파펜하임군 보병에게 후퇴하는 동안 본대를 엄호할 것을 지시하고, 전군을 라이프치히까지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황제군이 질서정연하게 철수에 들어갔기 때문에 틈이 보이지 않았고, 또한 자신들도 일시적으로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개신교 군은 추격을 관두었다.
 
이로써 뤼첸 전투는 종결되었다. 황제군이 철수하자, 개신교 군은 구스타프의 시체를 찾기 시작했다. 왕의 시체는 겹겹히겹겹이 쌓인 시체사이에서시체 사이에서 발견되었고, 그의 시체에서는 셔츠를 제외한 모든 장비가 빼앗긴 상태였다. 그날 착용한 황색의 바프코트는 전리품으로써전리품으로 황제에게 보내졌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오스트리아에서 스웨덴으로 반환되었다.
 
==결과와 영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