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SS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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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유겐트 사단에 약간의 휴식이 주어졌지만 신규 병력이나 장비의 보충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단은 얼마 후 전투에 재투입되었고 프랑스-벨기에 국경에서 벌어진 퇴각전에 참가했다. 1944년 9월 전투에 투입 가능한 사단의 척탄병은 500명을 헤아리기도 어려울 지경이었고, 전차나 중장비는 전무한 상황이었다. 9월 6일 [[쿠르트 마이어]] SS소장이 벨기에 [[파르티잔 (군사)|파르티잔]]에서 포로가 되었다. 당시 마이어 SS소장은 SS 제복 대신 육군 제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퇴각의 혼란 속에서 사단은 맡겨진 구원 임무를 제대로 수행해 낼 수 없었다. 포로가 된 마이어 SS소장 대신 사단 작전 참모인 [[후베르트 마이어]] SS소령이 사단 지휘권을 인수했다.
1944년 11월 전선에서 물러난 사단은 재편성을 위해 독일 본토에 위치한 [[나인부르크]](Neinburg)로 이동했다. 충원이 시급했던 병력은 공군과 해군 병사들로 채워졌고, 그 결과 재편된 사단은 1944년 봄과는 달리 정예라
[[1944년]] [[12월 16일]] 작전이 개시되었다. [[1 SS기갑 사단 LSSAH|제1 SS 기갑 사단 LSSAH]]에서 차출된 병력으로 편성된 파이퍼 전투단(기존 전차 전력에 [[6호전차B형 쾨니히스티이거|티이거2]] 중대가 추가되었다)이 140여대의 전차로 이 공세의 선봉을 맡아 적 수비선을 돌파해 나갔다. HJ는 파이퍼 전투단을 따라 진격로를 개척했지만, [[독일 12 국민척탄병사단|제12 국민척탄병 사단]]으로 인해 발생한 교통 정체로 진격은 금세 난항에 빠졌다. 전선에 이른 사단은 [[엘제보른 고개]]에 자리를 잡은 [[미국 99 보병사단|미국 제99 보병 사단]]과 동사단으로부터 전선을 인수한 [[미국 2 보병사단|미국 제2 보병 사단]]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다. 수 차례에 걸친 고된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꿈쩍조차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사단은 좌익으로 돌려지게 되었고, LSSAH 사단 본대가 선두에 서게 되었다. 미군의 방해로 사단은 목적지에 이르지도 못했고, [[파이퍼 전투단]]이 괴멸된 후에는 디트리히 SS상급대장의 제6 기갑군 또한 같은 처지가 되고 말았다. 연말이 가까워오자 HJ는 [[바스토뉴]]를 확보하기 위해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고, 바스토뉴 시 주변에서 악전고투했다. [[1945년]] [[1월 18일]] HJ를 포함한 모든 독일군은 진격을 개시했던 지점으로 되밀려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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