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브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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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9일, 누르 앗 딘은 공격을 개시했고, 안티오키아 공국군을 격파하였다. 레몽 공작과 이븐 와파 둘 다 난전중에 전사하였다. 이제 무엇보다도 중요한 [[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는 루트를 포함한 안티오키아 공국의 영토 대부분이 누르 앗 딘의 공세에 노출되게 되었다. 누르 앗 딘은 해안가로 달려가, 그의 정복을 기념하기 위해 바닷물에 몸을 담갔다.
[[그림:RecoveryOfRaymondOfPoitiersBody.jpg|thumb|left|전투 후에 되찾은 레몽의 시신.]]
어떤 작가는 이나브에서의 십자군의 패배를 한 세대 전에 일어난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아제르 상귀니스]](Ager Sanguinis)의 패배와도 비교할만한비교할 만한 재난"<ref>Smail, p 33</ref> 으로 평가하였다. 이 전투의 영향으로 하림(Harim)과 아파미야(Afamiya)의 성채가 승세를 타고 진격한 누르 앗 딘에게 함락되었다. 십자군은 하림을 1157년에 탈환하였으나, 1164년에 결국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누르 앗 딘은 이 여세를 몰아 [[안티오키아 공국]]를 공략하였으나, 함락하는 데 실패하였다. 비록 레몽 공작이 전사함에 따라 안티오키아는 혼란에 빠졌지만, 레몽의 미망인 [[안티오키아의 콘스탄스|콘스탄스]](Constance)와 [[주교]] [[리모주의 아이메리]](Aimery of Limoges)가 치열한 방어전을 전개하여 누르 앗 딘의 공세를 막아내었고, [[예루살렘의 보두앵 3세]](Baldwin III of Jerusalem) 역시 안티오키아를 구원하기 위해 북쪽으로 진군함에 따라 누르 앗 딘은 군대를 물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