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렝고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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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스 오레일리( Andreas O'Reilly)가 지휘를 맡은 약 3,300명의 오스트리아군 전위대는 프랑스군의 정찰거점을 점령하고 오스트리아군의 우익으로서 전열을 정비하였다. 멜라스가 지휘하는 18,000명의 오스트리아군 중앙은 폰타노(Fontanone) 하천 앞에 배치되어 있는, [[벨루노 공작 클로드 빅토르 페랭|클로드 빅토르]](Claude Victor)의 휘하 군단의 1개 혹은 2개의 사단을 지휘하는 가스파르 가르당(Gaspard Gardanne)의 프랑스 보병대의 저지를 받을 때까지 마렝고로 진군하였다. 피터 오트(Peter Ott)장군이 지휘를 맡은 7,500의 오스트리아군 좌익은 프랑스군의 북쪽에 위치한 카스텔 케리올로 성(Castel Ceriolo)을 프랑스군이 방어하고 있다고 오해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 움직임은 프랑스군의 우익을 포위하거나, 프랑스군의 전열과 밀라노와의 연락망을 끊을 수도 있었기에 프랑스군에게는 위협적이었다.
 
가르당 휘하의 부대는 훌륭한 활약을 펼쳐 상당한 시간동안시간 동안 오스트리아군을 저지하였다. 가르당 휘하의 사단이 지쳤을 때 빅토르는 이들에게 폰타노 하천 뒤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휘하의 2번째 사단을 지휘하던 자크 삼발르(Jacques Chambarlhac)에게 오스트리아군을 상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자크 삼바르는 수적으로 우세한 오스트리아군과 싸울 용기를 잃었고 곧 궤주하였다. 프랑스군은 오후까지 마렝고 마을과 폰타노 하천을 따라 전열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때 우익과 좌익 모두 아무 장해물 없이 노출되어 있었다. 우선 멜라스는 빅토르가 방어를 맡은 지역에 카를 해딕(Karl Haddick)의 사단을 보내 맹공을 펼쳤다. 그러나 카를 하디크는 전사하고 휘하 부대는 퇴각하였다. 이에 멜라스는 콘라드 카임(Conrad Kaim)의 사단을 보냈다. 결국 프랑스군에 지원군이 도착하자 피터 모르친(Peter Morzin) 휘하의 정예 척탄병 사단이 마렝고 마을 공격을 위하여 파견되었다. 이때 멜라스는 심각한 전술적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는 [[루이 가브리엘 쉬셰]](Louis Gabriel Suchet) 휘하의 군단이 남쪽으로부터 알렉산드리아로 접근한다는 잘못된 보고를 곧이곧대로 믿고 님프스히(Nimptsch)의 [[후사르]] 여단 2,300명을 떼어내 있지도 않은 남쪽의 적을 저지하는 데 파견했다.
 
마렝고에서 5km 정도 떨어져있던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기병대 일부가 남쪽으로 이동했음을 알았다. 나폴레옹은 오전 10시쯤에 이러한 오스트리아군의 움직임이 퇴각을 엄호하기 위한 양동작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휘하의 부관 [[장 란]](Lannes)과 [[조아생 뮈라]](Murat)에게 빅토르 휘하의 군단을 지원할 것을 명령했다. 장 란 휘하의 군단은 프랑수아 와트린(François Watrin)의 보병 사단, 조제프 마이노니(Joseph Mainoni)의 보병 여단 그리고 피에르 샹포(Pierre Champeaux)의 기병 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장 란 군단은 좌측이 취약한 전열을 이루었다. 켈레르만(Kellermann) 휘하의 중기병 여단과 제8 용기병 부대는 좌측의 보호를 맡았으나 빅토르 휘하의 부대를 포위공격하기 위해 공격을 개시한 조반니 필라티(Giovanni Pilati) 휘하의 오스트리아 경 용기병 부대의 공격을 받아 격파 당했다. 샹포는 오트 휘하의 부대를 저지하기 위해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오전 11시가 되었을 무렵 나폴레옹은 전장에 있었고, 분견대로 파견했던 부대들에게 급히 명령을 내려 구원하러 오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