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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397년]], [[후량 (오호십육국)|후량]]의 건강태수(建康太守) [[단업]]이 후량으로부터 자립하여 [[북량]]을 건국했다. [[398년]] 단업은 [[돈황]]을 장악하자 돈황태수 맹민(孟敏)을 사주자사(沙州刺史)에 임명하고 동시에 한인 호족의 지지가 두터운 이고를 교곡현령(效穀縣令)으로 임명했다. 얼마 후 맹민이 병사하자, 한인 호족의 추대로 이고가 돈황태수가 되었다. [[400년]], 북량의 진창태수(晋昌太守) 당요(唐瑤)가 모반을 일으키고, 이고를 대장군, 양공, 진·량 이주목, 호강교위(大将軍, 涼公, 秦·涼 二州牧, 護羌校尉)로 추대하면서 서량이 건국되었다. 이고는 북량의 [[저거몽손]]의 침공을 막는 한편 농경, 양잠 및 서역과의 교역을 장려하여 서량을 안정된 국가로 성장시켰다. 또한 한족사회의 전통에 충실하여 학교를 짓어 유교를 진흥시켜, 한족문화의 보호에 노력했다.
 
[[417년]]에 이고가 병사하고 [[이흠]]이 뒤를 이었으나, 아버지와 달리 무능하였고, 신하에게 냉혹하게 대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인망이 없었다. 또한 신하의 간언을 무시하고 [[420년]] 7월, 북량으로 원정에 나섰다가 오히려 저거몽손에게 대패하고 사로잡혀 처형당했으며 서량은 여기서 일시적으로 멸망하였다.
 
420년 10월, 이흠의 동생인 관군후(冠軍侯) [[이순 (서량)|이순]]은 돈황으로 도망쳐 양주자사를 자칭하여 다시 서량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421년]]에 흉노족 [[저거몽손]]이 돈황을 점령하여 서량은 완전히 멸망했다.
 
== 역대 군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