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카소바스 조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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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1년 교황청으로부터 이 조약에 대해 비준을 받았다. 이 조약을 통하여 [[이사벨 1세 (카스티야)|이사벨 1세]]는 왕권을 보장받는 대신에 너무나도 많은 것들은 포르투갈에 양보해야 했다. 카나리아 제도의 남쪽 바다인 대서양, 즉 북위 26도 이남 지역에서 포르투갈의 독점적 탐험과 항해권, 상업권을 인정하였는데, 이는 사실상 스페인이 대서양에서의 모든 활동이 봉쇄되었음을 의미한다. 스페인 학자인 안토니오 루메우 데 아르마스는 1479년 알카소바스의 평화협정으로 가톨릭 군주(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들이 평화를 지나치게 비싼 값으로 사들였다고 평가하였다.<ref>António Rumeu de Armas- book description, MAPFRE, Madrid, 1992, page 88.</ref> 그리고 역사학자 몬세라트 레온 게레로는 "...그들은 대서양에 의해서 영토와 세력확장을 포기하도록 강요받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고 덧붙였다.".<ref>Monserrat León Guerrero in El segundo viaje colombino, University of Valladolid, 2000, chapter 2, pp. 49–50.</ref>
 
이 조약으로 인해 스페인은 포르투갈의 허락없이 포르투갈의 영해(북위 26도 이남지역의 대서양)로 항해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추후 양국간의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1493년 3월, 콜럼버스가 1차 항해를 마치고 귀국한후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 영토분쟁이 발생하였다. 스페인으로부터 지원받은 콜럼버스가 항해를 통해 몇몇 개의 새로운 섬들을 발견하고 귀국했는데, 그 섬들이 북위 26도 이남에 위치해 있음으로있었기 인해때문이다. 양국간에 체결한 알카소바스 조약에 따르면 스페인은 북위 26도 이남 지역에 대해 항해를 할수도 없고 탐험과 개척이 금지되어 있었다. 따라서 콜럼버스는 이 조약을 위반하여 항해를 했을뿐만 아니라 콜럼버스가 발견한 새로운 땅은 포르투갈의 영토에 속했기 때문이었다.<ref>함규진 <조약의 세계사> 미래의 창</ref>
 
양국은 분쟁을 해결하고자 교황청에 분쟁조정을 요청하였다. 교황 [[교황 알렉산데르 6세|알렉산데르 6세]]는 1493년 5월3일 칙령을 통해 중재안을 발표했으나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2세는 교황의 중재안이 포르투갈에게 너무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불복하였다.<ref>이강혁 <라틴아메리카 역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102페이지</ref> 양국은 로마 교황청과 무관하게 단독으로<ref>윌리엄 번스타인 <무역의 세계사> 라이팅 하우스 264페이지</ref> 약 1년여의 협상 과정을 거쳐 1494년에 새로운 영토 경계선을 규정한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하였다.<ref>이강혁 <라틴아메리카 역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102~103페이지</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