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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에는 [[이하윤]], [[김진섭 (1903년)|김진섭]] 등과 함께 [[해외문학연구회]]를 조직하여 해외문학파를 형성하였다. 해외문학연구회의 기관지인 《해외문학》에 [[에드거 앨런 포]]와 [[조지 버나드 쇼]]를 논하는 평론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평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0년대 중반까지 활발한 평론 발표로 대표적인 해외문학파 평론가로서 활동하였으며, 특히 외국 이론의 단순한 소개에 그치지 않고 해외문학파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 계열의 계급주의 문학과 우파 민족주의 문학과 함께 문단을 삼분하는 것으로 자평하면서 하나의 문학적 유파를 자처하였다. 〈조선 현 문단에 소(訴)함〉(1931)이라는 평론에는 이러한 해외문학파의 관점이 잘 드러나 있고, 한국의 [[프롤레타리아트|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이 [[일본]]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단순히 모방하는데모방하는 데 그치면서 한국적 특수성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귀국한 뒤에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근무하면서 [[1931년]] [[유치진]] 등과 함께 [[극예술연구회]]를 창립하는데창립하는 데 참가해 신극 운동에 관심을 보였다. [[1932년]] [[송석하 (민속학자)|송석하]], [[손진태]]와 함께 [[조선민속학회]]를 창립하였고, [[조선어학회]]와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에도 참여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조선문인협회]]의 간사, 상무간사 등을 지내며 친일 평론을 발표한 일이 있다. [[1940년]] 《[[매일신보]]》에 실은 〈애국문학의 제창〉을 시작으로 [[태평양 전쟁]] 지원을 위한 순회강연에 참가한 뒤 이를 기록으로 남기는 등 총 11편의 친일 글이 남아 있다.<ref>{{저널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