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티에 생자부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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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티에 생자부아'''(프랑스어:Gautier Sans-Avoir) 또는 '''무일푼의 발터'''(영어,독일어:Walter Sans Avoir)는 11세기 후반 프랑스 북부출신의 기사로써 군중십자군의 지도자중지도자 한명이다중 한 명이다. 그의 출신지 및 경력은 명확하지 않다. 노쟝의 기베르(Guibert de Nogent)에 의하면 [[세느 강]]을 건너는 곳에서 태어났고, 포아시(Poissy)의 영주 고티에의 친척으로 프랑스 북부의 보아시생자부아(Boissy-sans-Avoir; 현재 [[이블린]]) 도시의 영주라고 추측된다. [[은자 피에르]]와 더불어, [[제1차 십자군]]에 앞서 군중 [[십자군]]의 순례자들을 이끌고 프랑스에서 [[성지]] [[예루살렘]]을 향했다.
 
로마 [[교황 우르바노 2세]]는 [[1095년]] 11월 [[클레르몽 교회회의|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설교를 통해 무슬림이 지배하는 예루살렘에 대한 군대의 파견과 그리스도교도에 의한 탈환을 호소했다. 예루살렘으로 간다면 죄를 용서해준다는 설교에 대해 서구의 서민 및 제후들은 열광했다. 프랑스 각지의 제후 및 기사들이 준비를 갖추는 동안, 은자 피에르는 열광하는 서민들을 이끌고 프랑스를 출발해 [[1096년]] [[4월 12일]] [[쾰른]]에 집합했는데, 그중에는 고티에도 있었다. 쾰른에서 독일인들과 합류를 기다리던 은자 피에르에 대해 고티에는 출발이 늦어지는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4월 15일]] 쾰른을 출발했다. 고티에의 선발대는 [[신성로마제국]], [[헝가리 왕국]], [[불가리아]]([[비잔티움 제국]]령)을 횡단했다. 독일과 헝가리에서는 아무일도 없이 통과했던 그들은 헝거리와 비잔티움 제국의 경계선에 해당하는 [[제문]]과 [[베오그라드]]에서 약탈행위를 벌였고, 곧이어 보복을 받았다. 고티에 일행은 비잔틴 제국군의 선도에 의해 [[7월 20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해 은자 피에르의 본대와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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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 콤네누스는 수도 근처에 모이면 시민과의 알력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하고, 군중 십자군에게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게 했다. 일행은 얼마안가 내분이 일어나 분열하고, 은자 피에르는 일행에게 자제를 촉구했지만 일행은 소아시아에서 약탈 및 [[룸 술탄국]]과의 교전이 일어났다. 1096년 10월 군중십자군은 셀주크 제국군의 복병에게 기습당해 [[니케아]]근교에서 괴멸되고, 고티에도 이때 전사했다.
 
훗날 고티에는 명예, 용기, 겸손등을겸손 등을 상징하는 인물로 [[성전 기사단]]의 규범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