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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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정보
|분쟁 = 가평 전투
|전체 = [[6.25 전쟁]]
|그림 = Kapyong South Korea 1952 (AWM HOBJ3147).jpg
|그림크기 = 320px
|설명 = 1952년 가평의 모습
|날짜 = [[1951년]] [[4월 22일]] ~ [[4월 25일]]
|장소 = [[경기도]] [[가평]]
|결과 = 유엔군의 승리
|교전국1 ={{국기나라|유엔}}
* {{국기|영국}}
* {{국기|뉴질랜드}}
* {{국기|오스트레일리아}}
* {{국기나라|캐나다|1921}}
* {{국기|대한민국|1949}}
* {{국기|미국|1912}}
|교전국2 = {{PRK}} <br />
{{국기|중화인민공화국}}
|지휘관1 =
{{국기그림|영국}} 브라이언 버크<br />
{{국기그림|오스트레일리아}} [[이안 브루스 퍼거슨]]<br />
{{국기그림|캐나다|1921}} [[제임스 스톤]] <br/ >
{{국기그림|대한민국|1949}} [[장도영]] <br/ >
{{국기그림|미국|1912}} [[매슈 리지웨이]] <br/ >
{{국기그림|미국|1912}} [[제임스 밴 플리트]]
|지휘관2 =
{{국기그림|중화인민공화국}} 원유첸 <br />
{{국기그림|중화인민공화국}} 덩위에
|병력1 ={{국기그림|영국}} [[제27보병여단]]
* {{국기그림|영국}} [[미들섹스 연대]]
* {{국기그림|뉴질랜드}} [[뉴질랜드 포병 왕립연대|RNZA 제16야전연대]]
* {{국기그림|오스트레일리아}}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제3RAR]]
* {{국기그림|캐나다|1921}} [[패트리샤 공주 캐나다 경보병연대|PPCLI]]
{{국기그림|대한민국|1949}} [[제6보병사단 (대한민국)|제6사단]]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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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2 = {{국기그림|중화인민공화국}} 제20군
|사상자1 = 47명 사상<br />
99명 부상
|사상자2 =최대 1,000명 사망
}}
{{전역상자 6.25 전쟁}}
{{전역상자 중공군 춘계공세}}
 
'''가평 전투'''({{lang|en|Battle of Kapyong}},{{zh|s=加平战斗|p=Jiā Píng Zhàn Dòu}})는 1951년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로 구성된 [[주한_영연방군|영국 연방군]]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인민지원군]]과 [[가평군|가평]]에서 맞붙은 전투이다. 전투는 [[중공군 춘계공세]] 때 발생했으며, [[제27보병여단]]은 남쪽의 서울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 중 하나인 가평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와 [[패트리샤 공주 캐나다 경보병연대]] 제2대대가 전방대대의 임무를 맡았으며 뉴질랜드 왕립포병여단, 그리고 미군 박격포 부대와 셔먼 전차 15대가 이들을 지원했다. [[사창리 전투]]에서 패배한 대한민국 제6사단 병사들이 협곡을 통해 철수하자 중공군은 여단의 방어지역으로 침투해 504고지에 위치한 오스트레일리아군을 공격했고, 전투는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제27보병여단은 오스트레일리아군이 여단의 측면으로 후퇴하기 직전까지 진지를 고수했다.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고, 중공군은 677고지에 위치한 캐나다군을 공세의 주요 목표로 변경했다. 하지만 격렬한 야간 전투 이후, 중공군은 캐나다군을 물리칠 수 없었다. 격렬한 전투 동안 2개의 대대는 중공군 사단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고, 중공군은 4월 25일 가평 북쪽으로 철수했다. 가평 전투는 중공군 춘계공세를 저지하는데 큰 기여를 했고, 캐나다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이 가평에서 보여준 전투는 중부 전선에 있던 [[유엔사령부]]가 뚫리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전투는 한국 전쟁 당시 오스트레일리아군과 캐나다군이 수행한 전투 중 가장 위대한 전투 중 하나로 잘 알려져 있다.
 
== 배경==
 
=== 전황 ===
{{본문|6.25 전쟁|6.25 전쟁 당시 오스트레일리아의 군사사}}
유엔이 1951년 2월부터 4월까지 수행한 반격공세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제8군 (미국)|미국 제8군]]은 인민지원군을 [[킬러 작전]] 때 [[한강]] 북쪽으로 몰아냈고, [[리퍼 작전]] 기간인 3월 중순에는 서울이 탈환되었다. 그리고 유엔군은 38선 이북으로 다시 진출할 수 있었다.<ref>O'Neill 1985, p. 121.</ref>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원수 (미국)|원수]] [[더글라스 맥아더]]와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의 경색된 관계는 맥아더를 유엔군 총사령관에서 해임하게 하였고, 그의 후임으로 [[매슈 리지웨이]] 장군이 임명되었다.<ref name=ONeill123/> 뒤이어 1951년 4월 14일, [[제임스 밴 플리트]]가 리지웨이의 뒤를 이어 미국 제8군과 주한 유엔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같은 날 리지웨이는 맥아더를 대체하기 위해 도쿄로 날아갔다.<ref name="ONeill132"/> 한편 공세는 일련의 짧은 공격들로 지속되었다. 3월 말 시행된 [[코리지어스 작전]]에서 유엔군은 38선으로부터 8km 남쪽인 벤튼선까지 진출했고, 4월 초의 [[러그드 작전]]에서는 38선 바로 위쪽인 캔자스선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미국 제8군은 4월 중순 유타선까지 진출했다.<ref name=ONeill125_127>O'Neill 1985, pp. 125–127.</ref>
 
[[매화산 전투]] 이후 유엔군이 꾸준히 북진하면서 [[제27보병여단]]은 미국 [[제9군단 (미국)|제9군단]]의 예비군으로서 복무했다.<ref name=Horner444>Horner 1990, p. 444.</ref> 1951년 4월, 여단은 1개의 오스트레일리아 대대, 1개의 캐나다 대대, 그리고 2개의 영국 대대를 합한 총 4개의 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각각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 [[패트리샤 공주 캐나다 경보병연대]] 제2대대, [[미들섹스 연대]] 제1대대, [[아르길 서덜랜드 하일랜더즈]] 제1대대였다. 여단장 [[배질 코드]]가 3월 23일 특별 배려로 홍콩으로 떠났기에, 여단은 현재 [[브라이언 아서 버크]]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ref name=ONeill123>O'Neill 1985, p. 123.</ref> [[뉴질랜드 포병 왕립연대]] 제16야전연대가 88mm [[오드넌스 QF 25파운더]] [[야전포]]로 제27보병여단을 지원하고 있었다.<ref name=Breen12>Breen 1992, p. 12.</ref><ref name=Butler103>Butler, Argent and Shelton 2002, p. 103.</ref>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는 [[이안 브루스 퍼거슨]]의 지휘 하에 있었다.<ref>Butler, Argent and Shelton 2002, p. 77.</ref> 패트리샤 공주 캐나다 경보병연대 제2대대는 이 무렵 [[제임스 스톤]]이 지휘했다.<ref>O'Neill 1985, p. 107.</ref> 중앙 구역에 배치되었던 여단은 미국 제9군단의 일부였으며, 제9군단에는 [[제24보병사단 (미국)|미국 제24보병사단]], 대한민국 [[제2보병사단 (대한민국)|제2보병사단]], [[제7보병사단 (미국)|미국 제7보병사단]], [[제6보병사단 (대한민국)|제6보병사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제9군단의 군단장은 소장 [[윌리엄 M. 호지]]였다.<ref name=ONeill134>O'Neill 198, p. 134.</ref><ref>Varhola 2000, pp. 88, 278.</ref>
 
[[파일:C Company 3RAR occupying Hill Salmon 16 April 1951 (AWM P01813).jpg|섬네일|right|150px|제3RAR이 1951년 4월 16일 "샐먼"에 있는 중공군 참호를 점령하고 있다.]]
이 무렵 제27여단은 미국 제24사단에 배속되어 있었으며, 3월 말 조종암 계곡을 따라 북쪽으로 진격하여 3월 31일 벤튼 선에 도달했다. 여단은 이후 제9군단과 함께 [[가평천]]의 좁고 깊은 계곡을 따라 동쪽으로 10km 진격했다.<ref name=ONeill125>O'Neill 1985, p. 125.</ref> 4월 3일부터 제27여단은 러그드 작전의 일환으로 12일 동안 강을 따라 30km를 진격했다. 비록 이 계곡은 중국인민지원군이 지키고 있지는 않았지만, 언덕 꼭대기에 숨어든 소규모 보병 집단이 능수능란하게 방어하고 있었다. 4월 8일 여단은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면서 "캔자스 선"에 도달하는 동안, 측면 언덕과 능선을 따라 전진하면서 연이어진 진지를 점령했다.<ref name=ONeill125_127/> 4월 11일 맥아더가 해임된 다음 날, 짧은 작전 휴식을 취한 후, 유타선을 향해 여단은 5km 진격했다. 중국인민지원군의 저항은 눈에 띄게 늘어났고, 여단의 초기 목표는 4월 13일이 되어서야 미들섹스 연대가 점령하였다.<ref name=ONeill127>O'Neill 1985, p. 127.</ref>
 
유타선을 향한 접근로는 900m 고지 2개가 가로막고 있었다. 사딘 고지가 1km 북쪽에 있었고, 샐먼 고지가 800m 더 북쪽에 있었다. 미들섹스 연대는 4월 14일 사딘 고지를 여러 차례 점령하려고 시도했지만 격퇴당했고,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에게 이 임무가 넘어갔다.<ref name=ONeill127/> 제3대대의 A 중대는 산마루를 점령했고, 이 과정에서 중국인민지원군 10명이 죽고 20명이 부상을 입었다. 오스트레일리아군은 8명이 부상을 입었다.<ref name=ONeill128>O'Neill 1985, p. 128.</ref> 다음 날 아침, 제3대대 C 중대가 가벼운 저항 속에 사격 한 번 없이 샐먼 고지를 점령했다. 고지 점령 후 중국인민지원군이 포격을 가해 오스트레일리아군 2명이 부상을 입었고, 이후 공습으로 중국인민지원군의 반격 시도를 저지했다.<ref>Breen 1992, p. 20.</ref> 한편, 패트리샤 공주 캐나다 경보병연대 제2대대는 우측으로 진격을 계속해 4월 15일 795고지를 점령했다. 중국인민지원군의 연이은 진지에서의 활발한 지연 행동에 직면한 캐나다군은 다음날 아침이 될 때까지 최종 목표였던 826고지를 점령하지 못했다.<ref>O'Neill 1985, pp. 128–129.</ref>
 
== 서막 ==
=== 중공군 춘계공세 ===
{{본문|중공군 춘계공세}}
[[파일:중공군과의 임진강 전투에서 공을 세운 영국군 1.jpg|섬네일|left|1951년 4월 중공군과의 [[설마리 전투]]에서 공을 세운 영국군 글로스터셔 연대.]]
유타선에 도달한 이후, 제27보병여단은 4월 17일 전선에서 물러난 뒤, 해당 지역을 대한민국 제6사단에 인계했다. 버크는 이후 서울에서 동해안으로 가는 주요 도로에 있는, 이전에 파괴되었던 마을 [[가평읍|가평]] 북쪽의 예비 진지로 이동할 것을 대대에게 명령했다.<ref>O'Neill 1985, p. 129.</ref> 정보부는 중국인민지원군의 새로운 공세가 임박했음을 알려주었고, 여단이 예비진지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이들은 3시간 전에 제9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이동했다.<ref name=ONeill131>O'Neill 1985, p. 131.</ref> 지난 7달 동안 연속적으로 작전을 수행했기 때문에 영국군은 예비군 기간 동안 여단의 대부분을 쉬게 할 예정이었다. 아르길 대대와 미들섹스 대대는 홍콩에서 오는 새로운 2개 대대로 대체될 예정이었고, 버크와 제27여단 본부는 4월 말 여단장 조지 테일러와 [[제28보병여단]]으로 대체될 예정이었다. 전쟁에 대한 캐나다의 지원 증대의 일환으로, 캐나다군은 5월에 새로 창설된 [[제25보병여단 (캐나다)|제25캐나다보병여단]]으로 전환될 예정이었다. 여단 본부 선발대와 아르길 대대는 4월 19일 서울을 떠나 홍콩으로 출발할 예정이었고, 남아있는 영국군 대대는 2주 후에 떠날 예정이었다.<ref name=ONeill131/><ref name=Breen18>Breen 1992, p. 18.</ref>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는 전환되지 않고 전쟁 전 기간 동안 여단의 일환으로 남아있을 예정이었고, 대신에 독자적인 보충 체계를 운용했다.<ref name=ONeill131/><ref>Breen 1992, p. 21.</ref>
 
한편, [[철의 삼각지대]]로의 진군 작전이었던 [[돈틀리스 작전]]에 대한 계획이 시작되었다. 철의 삼각지대는 남쪽의 [[철원군]]과 [[김화군]], 그리고 북쪽의 [[평양직할시|평양]] 사이에 있는 중국인민지원군과 조선인민군의 중요한 군사집결지이자 통신연결점이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계획에는 미국 제8군이 연이은 진지에 지연 작전을 수행하여 중국인민지원군의 또 다른 공세를 예방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ref name=ONeill131/>중국인민지원군과 조선인민군의 포병부대와 병참체계의 가시적인 강화를 포함하여 공산군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추가적인 징후로 리지웨이는 밴 플리트에게 ''와이오밍선''을 넘어서 공격을 가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이 있었던 리지웨이는 공세의 규모를 넓혀 동부 구역에 '앨라배마선'이라는 제2차 목표선을 지정했다. 그러나 밴 플리트는 4월 21일 공세를 개시했지만 그 다음 날 중국인민지원군과 조선인민군의 더 강력한 공세를 마주해야 했다.<ref name=ONeill132/>
 
[[파일:Disabled Centurion tank at Imjin (AWM HOBJ2237).jpg|섬네일|right|200px|영국 [[센추리온 (전차)|센추리온 전차]]가 1951년 4월 말 [[설마리 전투]]에서 파괴된 채 있다.]]
[[중공군 춘계공세]] 또는 중공군 제5차 전역은 한강 북쪽에 있는 미국 제1군단과 제9군단을 완전히 격파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공세에는 중국인민지원군 집단군 3개(제3집단군, 제9집단군, 제19집단군)와 조선인민군 군단 3개([[제1군단 (조선인민군)|제1군단]], [[제3군단 (조선인민군)|제3군단]], [[제5군단 (조선인민군)|제5군단]]이 참여했으며, [[펑더화이]]가 이들 부대의 총사령관이었다.<ref>Farrar-Hockley 1995, p. 109.</ref><ref name=zhang145>Zhang 1995, p. 145.</ref><ref name=cmsa309>Chinese Military Science Academy 2000, pp. 309, 326.</ref><ref group=note>중국군은 1950년대에 "사령관"과 "주석"을 제외한 군 계급이 없었다.</ref> 서울을 점령하는 것이 최우선의 목표였기 때문에, 4월 22일에 공세가 개시되었다. 미군 제1군단이 점령한 서부 지역의 [[임진강]]을 도하하는 주 공격에는 서울을 향해 진격하는 337,000명의 병력이 포함되어 있었다. 부차적인 임무에는 149,000명의 병력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 임무는 더 동쪽의 [[소양강]]을 건너 미국 제9군단 대부분과 [[제10군단 (미국)|미국 제10군단]] 일부에 소속된 중앙 및 동부 구역을 공격하는 것이었다.<ref name=Coulthard263>Coulthard Clark 2001, p. 263.</ref> 여기에 214,000명의 중국인민지원군이 공세를 지원했다. 총 700,000명 이상의 중국인민지원군이 공세에 참여하는 것이었다.<ref name=ONeill132>O'Neill 1985, p. 132.</ref> 준비의 일환으로, 전투에 단련된 제13집단군의 제39군과 제40군은 [[쑹스룬]]이 지휘하는 제9군집단 휘하 부대로 전환되었고, 제40군 사령관 원유첸은 가평에서 임진강으로 향하는 유엔군 증원군을 막는 한편, 대한민국 제6사단을 격멸하는 임무를 맡았다.<ref name=cmsa312>Chinese Military Science Academy 2000, p. 312.</ref><ref group="note" name=nomenclature>중국의 군사 용어에서 "군" (军)은 [[군단]]을 의미하며, "집단군" (集团军)은 [[야전군]]을 의미한다.</ref>
 
152,000명의 대한민국 국군, 245,000명의 미군, 11,500명의 영연방군, 그리고 기타 유엔 회원국에서 온 병력 10,000명을 포함한 418,000명의 유엔군이 공세를 맞닥뜨렸다.<ref name=ONeill132/> 그러나, 미국 제8군이 전선을 따라 대규모 침투를 막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인민지원군 보병 상당수가 유엔군의 측면을 휩쓸고, 유엔군의 철수를 막기 위해 전체 부대들을 포위했다.<ref>Johnston 2003, p. 89.</ref> 제1군단 구역에서 서울로 향하는 중국인민지원군의 주요 공격로에 놓여있었던 부대는 [[제29보병여단]]이었다. 임진강에 주둔한 여단은 이틀 동안 중국인민지원군 2개 사단을 저지하여 서울 점령을 막았지만, 영국군의 전쟁 중 가장 참혹한 교전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전투 중 [[글로스터셔 연대]] 1대대의 대부분은 [[설마리 전투]]에서 완강한 저항으로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대대의 지휘관 [[제임스 카네]] 중령은 그의 대대가 포위된 이후 [[빅토리아 훈장]]을 받았다.<ref>O'Neill 1985, pp. 133–134.</ref> 결국 제29여단은 캔자스선을 방어하는 중에 1,091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중국인민지원군 제63군에 상당한 피해를 입고 약 10,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글로스터셔 연대의 손실은 영국과 유엔 사령부 내에서 논란을 야기했다.<ref>Johnston 2003, pp. 90–91.</ref> 한편, 더 동쪽의 제9군단 구역에서는 중국인민지원군 [[제40집단군]] 제118사단과 [[제20집단군]] 제60사단이 4월 22일 밤 대한민국 제6보병사단을 공격할 준비를 마쳤다.<ref>Mossman 1990, p. 401.</ref>
 
== 전투 ==
=== 대한민국 국군의 붕괴 ===
{{본문|사창리 전투}}
 
== 각주 ==
{{각주}}
 
== 같이 보기 ==
* [[캐나다 전투 기념비]]
* [[영연방 참전 기념비]]
* [[가평의 날]]
 
{{한국 전쟁}}
[[분류:1951년 남북 관계]]
[[분류:1950년 분쟁]]
[[분류:한국 전쟁의 전투와 작전]]
[[분류:영국군이 수행한 한국 전쟁의 전투와 작전]]
[[분류:캐나다군이 수행한 한국 전쟁의 전투와 작전]]
[[분류:오스트레일리아군이 수행한 한국 전쟁의 전투와 작전]]
[[분류:뉴질랜드군이 수행한 한국 전쟁의 전투와 작전]]
[[분류:중국 인민해방군이 수행한 한국 전쟁의 전투와 작전]]
[[분류:조선인민군이 수행한 한국 전쟁의 전투와 작전]]
[[분류:1951년 4월]]
[[분류:가평군의 역사]]
[[분류:1951년 분쟁]]
[[분류:1951년 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