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 신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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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시조 =
| 집성촌 =
| 인물 = [[신천 (고려)|신천]], [[신예 (고려)|신예]], [[신부 (고려)|신부]], [[신돈]], [[신유정]], [[신빈 신씨]], [[신인손]], [[신윤]], [[신석조]], [[신영희]], [[신응시]], [[신경행]], [[신경진]], [[신계영]], [[소원 신씨]], [[신석정]], [[신격호]], [[신상우 (정치인)|신상우]], [[신춘호]], [[신준호]], [[신동주 (기업인)|신동주]], [[신동빈]], [[신재기]], [[신건 (법조인)|신건]], [[신학용]], [[신기남]], [[신경민]], [[신경림 (1954년)|신경림]], [[신정훈]]
| 년도 = 2015
| 인구 = 187,73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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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손 신천(辛蕆)이 1294년(충렬왕 20년) 과거에 급제하여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이르렀고,<ref>{{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EXM_KM_5COc_1294_000753|신천}}</ref> 신천의 동생 신혁(辛革)은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었다. 신혁의 손자 [[신예 (고려)|신예]](辛裔)가 충목왕 때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에 봉해졌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672317 『고려사』 권125, 열전38]</ref> 공민왕 때 신예의 동생 [[신부 (고려)|신부]](辛富)는 취산군(鷲山君)에 봉해지고, [[신돈]](辛旽)은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使司)로 집권하여 개혁을 추진했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672545 『고려사』 권132, 열전45]</ref>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50명, 공신 7명을 배출하였다. [[신부 (고려)|신부]]의 손자인 [[신인손]](辛引孫)이 세종 때 대제학에 오르고, [[신인손]]의신인손의 아들 [[신석조]](辛碩祖)는 세조 때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 분파 ==
* 8세 신지화(辛至和)
** 9세 [[신천 (고려)|신천]](辛蕆) → 덕재공파(德齋公派)
** 9세 신혁(辛革) → 초당공파(草堂公派)
** 9세 신온(辛蘊) → 부원군파(府院君派) → [[영월 신씨]](寧越 辛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