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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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사창리 전투}}
 
[[파일:3 RAR Korea (AWM P01813-449).jpg|300px330px|섬네일|1951년 3월 1일 587고지를 공격하기 위해 614고지에서 이동 중인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 C 중대. 이들은 가평 전투에서 큰 활약을 하게 된다.]]
대한민국 국군은 가평천 계곡 북쪽 끝의 진지를 사수하고 있었으며, 제27여단을 구원하기 위해 북쪽으로 10km 진격했다.<ref name=ONeill134/> 그러나 중국인민지원군의 공격이 예상되자, 사단장이었던 [[장도영]]은 오후 4시에 공세를 멈추고 2개의 선발 연대였던 제19보병연대와 제2보병연대에게 협력하여 방위 태세로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한편 [[제7보병여단|제7보병연대]]는 선발 연대 바로 뒤쪽에서 예비 진지를 구축했다.<ref name=Mossman382>Mossman 1990, p. 382.</ref><ref name=kimh630/> 방어에 대한 평판이 안 좋았던 대한민국 국군은 뉴질랜드군 야포와 미국 제213야전포병대대의 [[M101 105mm 곡사포]] 지원을 받고 있었다.<ref name=Horner69>Horner 2008, p. 69.</ref><ref name=Mossman402>Mossman 1990, p. 402.</ref>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세를 중지한지 1시간이 지나 방어시설을 구축했지만 대한민국 국군 선발부대는 일련의 고지 지역만 점령하고 계곡과 측면을 노출시켰다.<ref name=kimh630>Chae, Chung and Yang 2001, p. 630.</ref> 중국 제118사단과 제60사단이 오후 5시에 대한민국 국군을 공격했으며, 이들은 대한민국 국군이 허술하게 구축한 방어 지점들을 여러 곳에서 쉽게 돌파할 수 있었다.<ref name=kimh630/> 모든 전선에서 압박을 받자, 대한민국 국군은 곧바로 거의 모든 지역을 내주고 돌파당했다. 대한민국 국군은 무기, 장비, 차량을 모두 버렸으며, 흩어진 채 산과 계곡을 따라 남쪽으로 도주했다. 오후 11시에 장도영은 그의 모든 부대와 통신이 두절되었음을 인정해야 했다.<ref name=Johnston91>Johnston 2003, p. 91.</ref> 다음 날 오전 4시, 뉴질랜드군은 손실을 막기 위해 철수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군이 저항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뉴질랜드군은 다음 날 아침 미들섹스 연대를 방어군으로 삼고 계곡 쪽으로 되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해가 지자 대한민국 국군이 사실상 붕괴되었음이 명백해졌고, 뉴질랜드군은 다시 철수했다.<ref name=Horner69/><ref name=Johnston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