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창리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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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6사단의 궤멸 상태
* [[가평 전투|중국인민지원군의 가평 공격]]
| 교전국1 = {{국기|대한민국|1949}} <br/ > {{국기|미국|1912}} <br/ > {{국기|영국}} <br/ > {{국기|오스트레일리아}} <br/ > {{국기|뉴질랜드}} <br/ > {{국기|캐나다|1921}}
| 교전국2 = {{국기|중화인민공화국}}
| 지휘관1 = {{국기그림|대한민국|1949}} [[장도영]]
| 지휘관2 = {{국기그림|중화인민공화국}} 원유첸
| 군대1 = [[제6보병사단 (대한민국)|제6보병사단]]
| 병력1 =
| 군대2 = 제40군
| 병력2 =
| 사상자1 =
{{전역상자 중공군 춘계공세}}
 
'''사창리 전투'''는 [[제6보병사단 (대한민국)|제6사단]]이 [[1951년]] [[4월 22일]]부터 [[4월 24일]]까지 [[중공군 춘계공세]] 때 경기도 [[가평군]]과 강원도 [[화천군]]의 경계에 위치한 [[화악산]]과 강원도 [[화천군]] 사창리 일대에서 [[중국인민지원군]] 제9병단 예하 제20군단의 제58,제59,제60사단 등 3개 사단과 제40군단의 제120사단 등 총 4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받고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3일 동안에 걸쳐 전개한 방어 전투이다. 제6사단은제6사단을 지원하기 전투에서위해 중공군에게미국 크게제9군단 패배했으며예하 뉴질랜드 왕립 포병대대와 미국 포병 부대가 배치되었지만 제6사단의 무질서한 도주로 사단 전체가 궤멸되었으며, 이후이로 인해 결과는사창리 영연방군의남쪽에 [[가평주둔하던 전투]]로영연방 이어지게제27보병여단이 된다.중국인민지원군의 공격에 노출되고 말았다.
 
== 전투 ==
=== 배경 ===
=== 경과 ===
 
중공군 제9병단은 1951년 4월 22일 춘계 공세 계획에 의거 국군 제6사단 방어진지 정면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였다. 국군의 전방연대들은 사단장의 진지고수 명령에도 불구하고 중과부적에다, 후방지역에서 중공군의 출현이 확인되자 지난 해 [[온정리 전투]]에서 경험한 “중공군에게 포위되면 끝장이다.”라는 강박관념 때문에 무질서하게 후방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때 사단은 이미 후방으로 진출한 중공군에 의해 퇴로가 차단되었음은 물론 통신마저 두절되어 혼란이 가중되고 부대의 통제도 불가능하였다.
 
 
== 결과 및 영향 ==
1951년 4월 23일, 영연방군의 엄호를 받은 대한민국 국군의 철수 이후, 중국인민지원군은 계속 남하를 개시해 가평에 주둔하던 영연방군과 맞붙게 된다. 그러나 영연방군이 가평 일대를 고수하면서 중국인민지원군은 다시 북쪽으로 철수했고, 이후 중공군의 두번째 춘계공세였던 5월 공세 때는 가평이 점령당한다.
{{본문|가평 전투}}
 
1951년 4월 23일, 영연방군의 엄호를 받은 대한민국 국군의 철수 이후, 영연방군과 중공군은 가평에서 맞붙게 되었다. 가평 전투에서 영연방군이 승리를 거둠으로써 중공군의 공세는 다시 저지되었다.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