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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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상자 중공군 춘계공세}}
 
'''가평 전투'''({{lang|en|Battle of Kapyong}},{{zh|s=加平战斗|p=Jiā Píng Zhàn Dòu}})는 1951년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주로[[유엔사령부]] 소속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로뉴질랜드, 구성된영국군 [[유엔 사령부]]가부대가 [[중국인민지원군]]과 [[가평군|가평]]에서 맞붙은 전투이다. 전투는 [[중공군 춘계공세]] 때 발생했으며, [[제27보병여단]]은 남쪽의 서울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 중 하나인 가평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제3대대]]와 [[패트리샤 공주 캐나다 경보병연대]] 제2대대가 전방대대의 임무를 맡았으며 [[뉴질랜드 포병 왕립연대]], 그리고 미군 박격포 부대와 셔먼 전차 15대가 이들을 지원했다. [[사창리 전투]]에서 패배한 대한민국 제6사단 병사들이 협곡을 통해 철수하자 중공군은 여단의 방어지역으로 침투해 504고지에 위치한 오스트레일리아군을 공격했고, 전투는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제27보병여단은 오스트레일리아군이 여단의 측면으로 후퇴하기 직전까지 진지를 고수했다.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고, 중공군은 677고지에 위치한 캐나다군을 공세의 주요 목표로 변경했다. 하지만 격렬한 야간 전투 이후, 중공군은 캐나다군을 물리칠 수 없었다. 격렬한 전투 동안 2개의 대대는 중공군 사단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고, 중공군은 4월 25일 가평 북쪽으로 철수했다. 가평 전투는 중공군 춘계공세를 저지하는데 큰 기여를 했고, 캐나다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이 가평에서 보여준 전투는 중부 전선에 있던 [[유엔사령부]]가 뚫리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전투는 한국 전쟁 당시 오스트레일리아군과 캐나다군이 수행한 전투 중 가장 위대한 전투 중 하나로 잘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