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크스부르크 화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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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일단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싸움은 끝났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방 영주제(領主制)의 승리로, 개인에 대한 종교적 관용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ref name="글로벌_1" /> 하나의 신앙으로 제국을 통일하려던 카를 5세는 정책을 포기한채 은퇴를 고려하게 되었으며, 지방 영주들이 세속권력만이 아니라 종교권력까지 갖게 됨으로써 황제에 대항할 동기가 감소되었고 명분이 사라졌다.
 
인정받지 못한 칼뱅파와 영주의 신앙을 강제로 따라야 하는 지역민들은 불만스러워했고 저항도 지속되었다. 루터파에게 양보를 했다고는 하지만 기존의 제후가 개신교로 개종할 경우에 공직과 영지를 반납해야 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개종을 차단함으로써<ref>서희석<유럽의 첫 번째 태양 스페인> 을류문화사 2015년 p374 ~ 375</ref><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21435&cid=40942&categoryId=31575 <nowiki>[네이버 지식백과]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Augsburger Religionsfrieden] (두산백과).</nowiki>]....다만 종교제후가 프로테스탄트파로 옮길 때에는 그가 맡은 공직과 소속 영지를 잃게 되었다. 또한 ‘영주의 신앙이 영내(領內)를 지배한다’는 원칙이 인정되어 신앙 선택의 자유를 얻은 것은 영주뿐이며 영민은 영주의 신앙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앙을 달리하는 영민의 이동 자유는 보장되었다.</ref> 결국 황제는 가톨릭을 후원함을 분명히 했다는 점도 불만 요소였다. ‘교회의 수호자’ 자청해온 신성로마 황제와 소수의 가톨릭 제후들이 이미 주민의 다수가 개신교도로 바뀌어 버린 제국을 통치해야한다는 정치적인 난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했다.<ref>[네이버 지식백과] 30년 전쟁 - ‘로마제국’은 ‘신성’해야 하는가? (전쟁사, 함규진)</ref> 칼뱅파 신앙이 공인을 받게 된 것은 [[30년 전쟁|30년전쟁]]이 종료된 [[베스트팔렌 조약|베스트팔렌조약]](1648)에 의해서였다.<ref name=":0" />
 
== 각주 ==